“민족 배신한 매판자본 역사적 청산이 필요하다”


“제2, 제3의 나(친일파 세력)는 계속 나올 겁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한반도에서 친일파 역을 맡은 배우 문성근의 대사다. 친일 세력의 잔재가 아직도 사회 깊숙한 곳에 포진해 있다는 강우석 감독의 경고인 셈이다. 실제 친일역사 청산은 한국에 남겨진 과제이자 여전한 논란거리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청산은 번번히 좌초돼왔고 이에 따라 친일행위자의 기득권은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재계에서는 어떨까.〈일요서울〉은 친일행위자에 대한 조사를 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선정한 친일행위자 수록예정자 명단 및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을 통해 재벌가의 친일행위를 분석해 봤다.

친일파의 후손은 3대가 잘산다는 말이 있다.

친일파 청산이 고스란히 역사의 과제로 남으면서 친일을 통한 기득권이 계속 유지돼 왔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적어도 재계에서는 어느 정도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 실제 재계에 친일행위자 선조를 가진 경우는 적지 않다. 특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 재벌 역사에 친일행위의 족적은 종종 관측된다.


매판자본가 후손 두산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국내 유수의 기업인 두산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두산그룹은 국내 재벌그룹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꼽힌다. 최근 유동성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지주회사 전환 마무리 수순으로 접어들면서 보다 견고해진 지배체제를 갖추리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 이미 두산오너 3세의 경영 뒤로 4세까지 속속들이 등장하는 상황이다.

두산의 이같은 ‘재벌’의 기반은 어디서 시작됐을까. 두산그룹의 모태는 1898년경에 설립된 박승직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승직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이하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중 경제분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자본과 결탁하여 자국민의 이익을 억압하는 매판상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박승직은 경성 상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린 것으로 알려졌다. 1905년 당시 조선 상인들은 일본의 면제품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몰락하고 있었다. 포목상인들은 창신사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지만 일본 측 상인들의 횡포에 못 이겨 결국 해체되고 만 것이다. 당시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재빨리 공익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일본 대기업 이토추 상사의 자본을 끌어들였다.

공익사를 설립하여 활동할 즈음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제일은행의 일본인 지점장으로 하여금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일본인들 사이 박승직의 인지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부터 매판자본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데 이것이 박승직으로 하여금 ‘일조협력기업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얻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박승직은 공익사 성장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리라는 전쟁특수도 톡톡히 누리며 조선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에까지 사세를 확장하기에 이른다. 이어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해 일제 총력전체제에 협력했다.

박승직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일의 족적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에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친일을 자본의 매판화라고 한다면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박승직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인물로 꼽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 두산 초대 회장은 슬하에 6남매를 남겼고 이들은 각각 두산그룹의 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두산그룹은 장남 박용곤, 3남 박용성, 4남 박용현, 5남 박용만 등 3세 형제들을 주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형제의 난 이후 차남 박용오 전 두산회장은 제명됐지만 정원, 지원, 진원, 석원, 태원, 형원, 인원 4세 경영인들이 경영일선에 전진 배치되며 가족경영이란 큰 틀 가운데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당시 기업활동을 위해선 일본자본과의 관계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 “박승직은 오로지 기업활동만 했을 뿐 그 흔한 참의 의원도 맡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보광, 중앙일보 친일행위자 후손

보광그룹의 선조도 친일행위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석규 보광 회장의 부친인 홍진기 때문이다. 홍진기는 식민지 시절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시보, 검사대리 1944년 전주지법 판사를 지냈다. 당시 일제 치하에 법관을 지냈다는 비판 때문인지 민족문제연구소는 홍진기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목록에 올렸다. 하지만 홍진기의 일제시대 관직은 해방 이후에도 고스란히 유지됐다.

그는 1945년 9월에 미군정청 법제부 법제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8월 15일에 해방이 됐는데 불과 한 달도 안돼서 미군청정 법제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이후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거치게 된다. 1960년 3·15 부정 선거 당시 그는 법무부장관이었는데, 이후 4월 마산 사변으로 내무부장관이 사퇴하자 후임 내무부장관 직을 맡았다.

그가 내무부장관으로 있었던 4월 19일 경찰 발포로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죽었다. 당시 홍진기는 이승만 대통령을 강력히 설득해 계엄령을 선포하게 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족적 때문에 그는 4·19 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특사로 풀려났다.

홍씨 일가와 삼성의 관계는 무척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홍진기가 특사로 풀려날 무렵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이 면회를 오면서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홍씨일가는 본격적인 재벌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1963년 특사로 풀려난 홍진기는 1964년 삼성이 세운 서울중앙라디오방송 사장으로 취임해 언론 사업을 시작했다. 1966년에는 역시 삼성이 세운 중앙일보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7년 홍라희와 이건희의 결혼으로 두 집안은 사돈이 됐다.

현재 홍진기의 장남 홍석현 전 주미대사는 중앙일보 회장을 맡고 있다. 차남 홍석조는 광주고검장 및 인천지검장을 지낸 뒤 보광훼미리마트 대표이사, 삼남 홍석준은 삼성 계열사인 삼성SDI 부사장을 역임한 뒤 보광창투 회장으로 자리잡았다. 사남 홍석규는 보광의 대표이사 회장이다. 보광그룹은 1999년 삼성과 중앙일보가 분리되는 과정에서 같이 삼성으로부터 분할 됐다. 막내딸인 홍라영씨는 리움박물관 수석 부관장과 삼성문화재단의 상무를 겸하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일제시대 공직만 거쳤다고 모두 친일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오너의 친일행위에 대한 일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룹 한 관계자는 “일제시대 공직만 거쳤다고 모두 친일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보광그룹 관계자는 “오너의 친일행위에 대한 일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향한 민족자본가 현대그룹

현대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에 의해 설립된 재벌그룹이다. 하지만 2000년 형제간 분쟁으로 인해 현대그룹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을 비롯해 현대중공업그룹, KCC그룹, 현대그룹 등으로 분할된 것이다. 이중 친일족적을 논할 때 거론되는 것은 바로 현대그룹이다. 정씨 일가가 오너를 맡고 있는 여타 그룹과 달리 현대그룹은 고 정몽헌 명예회장이 작고한 뒤로 부인 현정은 회장이 이끌고 있다. 친일 족적이 거론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현 회장의 조부 현준호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이하 친일파 708인 명단) 및 민족문화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중 경제 분야에 이름이 실려 있다.

현준호는 호남의 대부호로서 호남은행을 경영했던 인물로 꼽힌다. 1920년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민족자본의 호남은행을 창립하게 되는데 당시 목포 광주 일대의 민족계 대지주나 상업자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직원도 전부 조선인으로 채용하면서 민족자본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다. 문제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시기를 전후해서 노골적인 친일 전향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현준호의 부친인 현기봉은 전라남도 참사, 전라남도평의회 의원, 중추원 참의 등 일제치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그가 사망하게 되자 현준호가 그 뒤를 잇게 됐다. 부친의 뒤를 이어 전남 도평의회의원, 중추원 참의 등 일제 요직을 거친 것이다.

1937년에는 일본의 지도직 지위를 대중에게 선전하는 시국강연반에 연사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또 1938년 설치된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에도 포함됐다. 당시 임명된 위원은 총 97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조선인은 현준호를 포함해서 11명이었다. 당시 현준호와 함께 임명된 조선인 시국대책조사위원은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 박영철 중추원 참의 등 거물급 친일파로 손꼽히는 인물들이다. 현준호가 이들 친일파 거물들과 시국대책조사위원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총독부측의 신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족적 때문에 현준호는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붙잡혀 광주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현영원은 합작회사로 대한제철을 경영하다 현대상선에 합병된 신한해운을 창업했다. 현영원의 부인인 김문희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주요주주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준호는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바 있다”며 “친일행위자가 아니라 민족자본가이자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사람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전쟁 협력기업 삼양그룹

재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기업으로 삼양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삼양그룹의 과거는 썩 밝지 않다. 창업주 김연수가 친일행위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까닭이다. 김연수는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올라있다.

김 창업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1921년 교토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후 형인 김성수가 경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간부로 근무했다. 이어 1925년경부터는 동아일보 운영 등으로 사회 활동에 나선 김성수를 대신해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을 주도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오랫동안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친일족적 꼽을 수 있는 것은 학병 권유활동이다. 1943년 10월이 되자 일제는 조선의 지원병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학도병’제의 실시를 공포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들의 학병 지원이 매우 저조하자 학병 권유 행각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김 창업주는 역시 여기에 참여했다. 1944년 1월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권세대의 파견절차를 협의한 뒤에 일본에 파견돼, 일본유학생들의 학병 입대를 권유하는 유세를 행했던 것이다. 그의 학병권유 논리는 1월 19일자〈경성일보〉에 실린 “조선의 학도들, 빛나는 내일에 입대하라”는 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또 그가 ‘친일 행위자’로 간주되는 핵심적인 근거는 국방헌금의 납부와 전시공채의 매입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1937년 중국침략 직후부터 시작된 이른바 ‘성심 국방헌금’의 납부행위를 김 창업주가 주도했다. 그 자신과 경성방직 또는 방계회사의 이름으로 납부한 헌금 총액은 80만원을 상회한다. 1941년 경성방직의 한 해 순이익이 80만원이었음을 상기하면 적은 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다음 헌납액수를 차지하고 있는 박흥식을 월등하게 상회하고 있어 그의 경제력과 일제권력 유착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일제가 특히 중국 침략 이후 불어나는 전쟁경비를 채권의 남발로 충당했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채권 매입의 강요와 더불어 채권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악화로 민중의 생활고가 가중된 것이다. 김 회장 역시 채권매입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은 별다른 흠이 되지 못했다. 김 회장은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났다. 1961년에는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하기까지 했다.

삼양사의 가계도는 상당히 복잡하다. 창업주인 김연수의 슬하에 아들 7명과 딸 6명, 총 13명의 자녀를 둔 탓이다.

김연수 3남인 김상홍과 5남 김상하의 공동 경영 체제를 거쳐 손자 김윤이 회장직을 이었다. 김윤 회장의 동생 김량은 삼양제넥스 사장을 맡고 있으며, 김연수의 5남 김상하의 자녀 김원, 김정은은 현재 각각 삼양사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을 맡고 있다. 친족이 많다보니 형제경영을 비롯해 사촌형제 경영까지도 곳곳에서 관측된다. 김연수 회장의 자녀들이 친족경영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온 까닭이다.


나라 배신한 왕족 그랜드힐튼 호텔

그랜드힐튼 서울 호텔을 소유, 운영하는 이우영 동원ICN의 회장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핏줄이다. 하지만 그가 핏줄의 정통성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친일 행위자’라는 과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조부 이해승은 친일파 708인 명단 및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올라있다.

이해승은 철종의 형, 영평군의 손자였다. 하지만 왕족의 종친이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었다.

이해승의 이력은 다채롭다. 한일병탄 후 21세에 조선인으로서 가장 높은 귀족인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고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섰다. 덕분에 그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비롯한 각종 서위를 받았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훈포상만 수두룩할 정도다.

결국 그는 광복 이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6.25전쟁 때 행방불명 됐다. 하지만 재산은 고스란히 보존됐다. 명의 변경 등을 통해 다양하게 자산을 전환했기 때문이라는 평가이다. 덕분에 그의 손자 이우영 회장은 재계에서 제법 알려진 인물이 될 수 있었다.

가문 재건에 나선 것이 바로 이우영 회장이었다.

그는 1988년 전계대원군과, 회평군, 영평군이 모셔져 있는 홍은동 백련산의 묘지들을 포천으로 이장한 후 누동궁 팔아 스위스 그랜드 호텔 설립했다. 이우영 회장이 운영하는 동원INC가 60%, 스위스항공이 20%, 네슬레가 20% 투자했다.

이후 스위스항공 부도내자 이 회장은 나머지 지분 40% 사들여 100% 지분 확보했다. 지난 2002년에는 힐튼호텔의 브랜드를 빌려와 그랜드힐튼서울호텔이 됐다.

앞으로도 이해승의 친일논란은 이우영 회장을 따라붙을 전망이다. 지난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우영 회장이 보유한 서울 홍은동, 홍제동, 응암동 및 경기 포천 일대 192필지 192만5238㎡에 대해 국가귀속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공시지가로 따져도 114억여 원, 시가로 318억여 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하지만 이 회장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 회장은 재산조사위에 환수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소장에서 “이해승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것은 한일합병 등 친일행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식민지 통치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조선왕실의 종친을 이용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후손 욕할 수는 없지만…

한편, 이같은 친일행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후손을 친일재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선조의 죄를 후손에게 물을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당시 시대상황에서 ‘적극적 친일 행위’와 ‘마지못한 친일 행위’의 구분점도 모호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해당 기업들은 모두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오히려 친일행위를 한 것으로 평가되는 선조에게 민족자본가, 근대화 경영인이라는 평가마저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사학계 입장은 다르다. 학계 한 관계자는 “민주주의가 발달하며 국민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정치권 인사와 달리 경제계 자본의 축적은 오히려 더 안정적이 돼 갔다”고 평가했다. 때문에 적어도 친일행위자의 3대가 유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만큼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인다. 이 관계자는 “친일에서 시작된 부의 상속은 원천부터 잘못된 것”이라며 “당시 축적된 부와 지식 등으로 츨발점이 남들보다 한참 앞서있었음은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국내의 청산되지 못한 친일의 역사는 앞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질 전망이다. 이와 반대로 ‘독립운동가의 자손은 3대가 굶는다’는 말이 있음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친일 재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사과하라”

친일 선조를 가진 재벌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이 이뤄질 전망이다.

인터넷 카페로 활동 중인 민족반역자처단협회(이하 민처협)는 친일파 규명 및 규탄, 독립운동가 찾아가기 운동 등을 주도하는 단체다. 독립운동가 추모행사 및 병문안 등의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고, 생존 중인 친일행위자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들의 카페 첫 화면에는 친일 선조를 가진 재벌에 대한 제품이 망라 돼있다.

이병두 민처협 부위원장은 “재벌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친일 행위 때문이라면 마땅히 도의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동포의 피를 빨아서 부를 늘렸던 것이 현재 재벌까지 올라간 것”이라고 성토했다.

이 부위원장에 따르면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한다. 민처협은 현재 188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가난하기 그지없다는 것이 이 부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최근 밀양에서 찾아뵌 독립운동가는 해방 이후에도 빨갱이로 몰려 계속 숨어 다녔다고 한다”면서 “그러다보니 자녀 교육의 기회까지 막혀 사실상 사회 중심으로 진출할 기회를 잃어왔다”고 말했다. 오죽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신념이나 애국심을 저버리고 ‘기회가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는 것. 이 독립운동가에게 독립운동이란 빈곤의 대물림이 시작되는 후회였을까.

적어도 친일 선조를 둔 재벌가의 부흥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향후 민족반역자처단협회는 향후 친일 선조를 가진 기업들의 불매운동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 부위원장은 “가장 큰 문제는 과거 친일 행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친일에 대한 과오를 떨칠 수 있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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