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정태익 편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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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일본, 80억 달러 대일 차관 요구에 40억 달러 경협 차관
라이베리아가 우리의 입장 대변해 주는 중요한 역할


- 1979년 8월 경 주일본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이어서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등 국내 정세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주일대사관에 근무할 당시 한·일 관계는 어떠했나. 


▲ 구주총괄과장 임기를 마치니 해외 발령을 받을 시기가 됐다.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일본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라는 생각에 일본 근무를 택했다. 중요한 시기에 일본에 갔다. 한국 현대사는 격동의 연속이었지만, 특히 1979년에는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때 나는 일본에 있었다.

1등 서기관으로 주일대사관에 부임해 대사관 내의 순환근무제도에 따라 총무업무, 영사 업무, 마지막으로 정무 업무를 담당했다. 정무과 담당은 한·일 양자 담당과 일본의 제3국 관계 담당으로 나뉘어 있는데 나는 일본의 제3국 관계를 맡았다. 주일대사는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을 오래 역임한 김정렴 대사였다. 내가 9월에 부임을 했는데 10·26사태로 일본 조야가 깜짝 놀랐다. 국내에서는 보안 때문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사안들이 일본에서 적나라하게 보도됐다. 대통령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대사관은 사상 최대의 조문객을 받았다. 당시 김정렴 대사 아래 오재희 공사, 김병언·최동진·장만순·김경철 참사관, 이재춘·김석우·신성호·조상훈·최상덕·성정경·조규태·황규정 1등서기관이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80억 달러의 차관을 요구했다. 한국이 공산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고 있는 만큼 일본이 상대적으로 득을 보고 있음을 근거로 1개 사단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에 상당하는 80억 달러를 경협 자금으로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 헌법상 국방비로 전용되는 원조는 불가하지만, 이웃 국가로서 경제협력은 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 총리는 스즈키 젠코로 바뀌었고, 외상은 소노다 스나오였다. 당시 노신영 외무장관이 일본을 방문해 소노다 스나오 외상과 직접 담판을 했다. 당시 한·일 관계의 가장 큰 현안은 우리의 80억 달러 대일차관 요구였다. 결국 밀고 당기고 하다가 일본이 이웃으로서 선린관계를 고려해 40억 달러 경협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론이 났다.

당시 재외공관에서 본부로 전보를 제일 많이 친 사람이 나였다. 우리나라가 국내외적인 정책을 수립할 때 일본의 대외정책·제도·법령을 반드시 참고하기 때문에 주일대사관으로 조회 전보가 매일 쇄도했다. 응답하는 전보 수요가 많았다. 특히 국제 이슈가 시시각각 발행될 때마다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정하기 전에 일본의 입장을 파악하려 했다.

나는 문의하는 모든 이슈에 대해서 일본의 입장을 파악해 보고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본은 대국으로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모든 국제 이슈에 대해 항상 정리된 입장을 가지고 있어 곧바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중견국이 된 우리나라도 모든 국제 이슈에 대해 입장을 바로바로 정립하는 능력을 갖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1981년 11월경 아프리카 주라이베리아대사관 참사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근무 환경이 급격히 바뀌는 바람에 굉장히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대사는 어떤 배경으로 주라이베리아대사관으로 갑작스럽게 배치됐나. 또 당시 아프리카에서 우리 한국 외교의 주안점은 무엇이었나.

▲ 3년 가까이 일본에서 열심히 근무를 하다가 귀국할 생각이었는데,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작스럽게 아프리카 발령이 났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 출신이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로 초임 대사가 된 군 출신 공관장을 보좌하라는 임무를 띠고 아프리카로 발령받았다. 육사 18기를 중심으로 한 대령급 인사 6명을 장군으로 진급시켜 아프리카 주재 대사로 발령을 냈다.

당시 노신영 외무장관은 외교 경험이 없는 군 출신 대사를 보좌할 중견 외교관을 주요국에 근무하고 있는 1등서기관 중에서 선발했는데, 내가 주라이베리아대사관 참사관으로 차출됐다. 라이베리아가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발령받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발령받고 나서 조사를 해보니,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전에 북쪽에서 해방된 노예 중에서 일부 흑인들이 아프리카에 귀환 정착을 해서 흑인 원주민들을 내쫓고 세운 나라가 라이베리아다. 미국 헌법을 그대로 도입했고, 수도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몬로비아로 명명했고, 국호도 리버티, 곧 자유를 의미하는 라이베리아로 정했으며, 화폐도 미국 달러를 그대로 쓴다. 해방된 미국 노예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점령당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나라다. 라이베리아 역대 대통령들은 미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후예가 당선됐다.

내가 부임했을 때는 토착민으로 상사 출신인 새뮤얼 도가 윌리엄 톨버트 대통령을 살해하고 쿠데타에 성공해 대통령이 된 혼란의 시기였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 때문에 가족 모두가 개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대로 적응해 근무를 했다. 

우리나라가 아프리카에 공관을 많이 유지하고 있던 배경은 남북 간의 외교대결 때문이다. 북한과의 외교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비동맹외교를 적극 전개했다. 우리는 북한의 방해로 비동맹권에 가입하지 못했고, 북한은 가입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비동맹권이 북한의 독무대였기 때문에 비동맹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우리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외교의 중요한 책무였다.

라이베리아는 미국과 특수한 관계였기 때문에 북한과 수교를 하기는 했지만 북한 측에서 대사를 파견하지는 못했다. 비동맹회의가 영릴 때마다 비동맹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나라가 필요했고, 당시 라이베리아가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에 군 출신 이시용 대사가 처음으로 부임했는데, 이 대사를 도와서 비동맹외교를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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