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31)
삼 불 망(三不忘) - (31)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11-19 13:50
  • 승인 2018.11.19 14:01
  • 호수 1281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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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 같은 상소를 받은 원 태정제(泰定帝)는 진상을 확인토록 하였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입성책동(立省策動)을 꺾어
고려 사직을 구하다

공자는 3년상이 천하의 통상(通喪)이라 했다.

통상이란 위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하의 모든 계층에 두루 통하는 상례라는 뜻이다. 공자는 자식이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은 부모의 삼년지애(三年之愛, 부모가 생후 3년간 젖먹이고 길러준 사랑)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고려 말 당시는 상제(喪祭)가 문란해져 사대부들 대부분이 삼년상을 줄여 백일 단상(短喪)을 치렀다. 그러나 이제현은 예법에 따라 관직을 내놓고 시묘(侍墓)를 살았다.

임술년(1322, 충숙왕9) 가을 어느 날이었다. 이제현은 평소처럼 풍수지탄(風樹之嘆)을 하며 <한시외전(韓詩外傳)>의 한 구절을 읊조리고 있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요,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

‘나무는 고요하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모시고 싶어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이제현에게 뜻밖에 충숙왕으로부터 교지가 내려왔다.

‘익재 공, 그대에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제수한다. 올 연말까지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만권당을 지켜주기 바란다.’

지밀직사사는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 기밀에 관한 일을 보는 종2품의 벼슬이다. 충숙왕은 이제현에게 유배 중인 충선왕을 위해 고려 조정의 대변인 역할을 맡아 달라는 어명을 내린 것이다.

지엄한 어명을 어길 수는 없지만 이제현은 난감했다. 아버지의 삼년상과 충선왕의 방면 둘다 경중을 논할 수 없는 일. 이제현은 번민했다. 그러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따르기로 했다. 더구나 아버지 이진이 임종하면서 ‘종사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남긴 유언이 이제현에게 힘이 되었다. 이처럼 이제현은 고려 조정의 의사를 원나라 조정에 알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큰 인물로 부쩍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이제현은 충숙왕과 왕고의 권력투쟁을 크게 우려했다. 왜냐하면 고려왕과 심양왕 간의 권력투쟁은 고려 조정의 내부분열을 일으켜 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스스로 말려드는 우(愚)를 범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제현이 우려했던 대로 흘렀다. 왕고의 집권 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그 추진 세력들은 기민하게 다시 목표를 전환했다. 고려를 통째로 원나라에 바치자는 매국적인 ‘입성책동(立省策動)’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심리계로 원나라 조정을 흔들다

1323년(충숙왕10) 정월.

이제현이 원나라에 다시 온 후 해가 바뀌고, 연경에 대보름 명절인 원소절(元宵節)이 돌아왔다. 집집마다 대문에 내걸린 꽃등에서 빛이 출렁이고 그림자는 어지럽게 움직였다. 등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빛과 그림자 속을 가르며 지나갔다. 등은 각양각색 저마다의 색과 모양을 자랑했다. 꽃등·새등·동물등·궁등·정자등·주마등……. 정월 13일 밤에 ‘등 걸기’가 시작되고, 정월 18일 밤에야 비로소 ‘등 내리기’를 하는 원소절.

휘영청 밝은 달빛이 연경의 거리를 교교하게 비치고 있었다. 2년 반 만에 만난 이제현과 해월이는 등놀이 구경을 나와 야경을 즐기다가 자정이 이슥해서야 만권당으로 돌아왔다.

대보름, 우수를 지나 개구리가 겨울잠을 깨는 경칩이 지났건만,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았다(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 원나라 조정은 충선왕을 방면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마음을 끓이고 있는 이제현은 초조해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가는 상왕 전하를 영영 뵙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이제현은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상왕 유배 해제 문제로 고민하며 만권당 서재에서 이런 저런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해월이가 부젓가락을 집어 화로의 재에 세 글자를 썼다.

‘심리계(心理計)’

이제현은 무릎을 탁쳤다. 병법에 일가견이 있는 이제현이 아니던가. 손자병법 13편 간용(間用)편에도 ‘정보심리전과 간첩전을 최대한 활용하라’고 쓰여 있다.

“해월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였소?”

“선생님,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 아니옵니까.”

“내가 지금 영혼을 팔아서라도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해월이는 단 세 글자로 해결하였소 그려.”

“아이, 선생님도…….”

그날 이후, 황궁 주변에는 몇 날 며칠 어디선지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이제현이 휘영청 달 밝은 밤에 황궁 북쪽의 경산공원에 올라가 가슴에 사무치는 비애를 퉁소로 달랬기 때문이다. 고요한 한밤중에 슬픔에 겨운 퉁소 가락은 황궁 주변 인가에 속속들이 울려 퍼져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더러는 얼굴을 돌려 눈물과 시큰해진 코밑을 훔치기도 했다.

“누가 한이 얼마나 쌓였으면 퉁소를 저렇듯이 구슬프게 불 수 있을까?”

“단장(斷腸)의 비감이 서려 있는 퉁소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까닭없이 눈물이 나는구나.”

이제현의 퉁소 소리는 황성 안에도 울려 퍼졌다. 그리하여 원나라 조정에서는 퉁소 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무슨 까닭으로 퉁소를 불었는지를 알아보라는 뜻밖의 분부를 내렸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지밀직사사 이제현이 토번(티베트)에 귀양 가 있는 충선왕을 그리워하여 퉁소를 불었다’는 사연이 원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충선왕의 유배 문제가 정가의 화제로 떠올랐다.

이제현은 원나라 조정에서 충선왕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자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나라 낭중(郞中)에게 충선왕의 방환(放還, 귀향살이하는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냄)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족하(足下, 비슷한 연배 사이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께.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창한 이래로 무릇 4백여 년, 사대한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만 성조(聖朝)에 신하로 복종하여 해마다 직공(職貢, 공물)의 예를 게을리 한 적이 없었습니다.

세조황제(쿠빌라이)가 강남에서 남송을 치고 회군할 때, 원종은 천명(天命)의 돌아감과 인심의 복종하는 바를 알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6천여 리를 가서 양(梁)·초(楚)의 들에서 뵈었습니다.

충렬왕도 몸소 조현(朝見, 제후가 황제를 배알하는 일)의 예를 닦아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고려의 병력을 모두 출동시켜 전봉(前鋒)이 되었으며, 합단(哈丹, 원나라의 반란군)을 토벌하여 적의 괴수를 무찔러 죽였습니다.

공주를 하가(下嫁)시켜 대대로 구생(舅甥, 장인과 사위)의 정의를 두텁게 하고 고려 고유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게 한 것은 세조 황제의 조서 덕택입니다.

대체로 먼 속국을 회유하고 친척에게 돈목(敦睦, 사이가 두텁고 화목함)하게 하는 것이 선왕의 도리이며, 공으로써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춘추의 법입니다. 족하는 어찌하여 승상에게 말하여 충선왕이 회개하고 있으며, 여러 대의 충근(忠勤, 충성스럽고 근실함)을 저버릴 수 없고, 본국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을 막을 수 없으며, 세조의 폐부친속(肺腑親屬, 황실의 친족)도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을 황제께 아뢰지 않습니까?

그리하시면 대승상의 덕이 먼 곳에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더욱 드러날 것이며, 천하는 모두 족하를 칭송할 것입니다. 어찌 오직 고려 군신들만이 살에 새기고 뼈에 새겨 그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꾀하는 데에만 그치겠습니까?

또한 이제현은 최성지와 함께 쓴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올리는 글’에서 충선왕 유배의 부당함을 원나라 조정에 공론화함으로써 충선왕의 방환을 밀어붙였다.

배주 승상께.

충선왕을 중상모략하여 귀양가게 한 임백안독고사는 고려의 왕위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는 오만불손한 인물입니다. 충선왕이 일찍이 황태후께 청하여 임백안독거사가 고려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충선왕에게 원한을 품고 승상 팔사길을 뇌물로 매수해서 충선왕을 중상했습니다. 결국 영종 황제께서 진노하셔서 충선왕이 몸 둘 바를 몰랐으나, 집사(執事, 귀인에 대한 높임말)께서 이를 가엾게 여기어 천둥과 번개 같은 위엄으로 죽은이를 살려내기를 백골에다 살을 붙이듯 하여, 가벼운 법을 좇아 용서하여 귀양 보내게 했습니다.

그곳은 매우 멀고 궁벽하여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며 풍토와 기후가 아주 다릅니다. 불의에 일어나는 도적떼와 닥쳐오는 굶주림에 몸은 여위고 머리털은 모두 희어지고 마음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습니다. 충선왕은 벌써 2년 동안 토번에서 귀양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 고통은 말만 해도 눈물이 납니다.

충선왕은 친속 관계로 말하면 세조황제의 친 외손이며, 공으로 말하면 선황제의 공신입니다. 또한 원나라가 처음 용흥(龍興, 왕업이 흥함)할 때부터 의를 사모하여 먼저 복종하고 대대로 충성을 바쳐온 공이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집사께서는 처음에도 힘을 다하여 충선왕을 구출하였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마시고 천자(원 황제)께 정상(情狀, 딱한 사정)을 거듭 자세히 아뢰어서 두터운 은혜를 유도하여 주십시오.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