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넌 아니다. 넌 현자(賢者)가 아니라구. 현자라 하기에는 너무 멀쩡해. 안전한 길로 다녀서 흠집 하나 없잖아. 내가 아는 한 현자는 몇 배나 더 거칠어야 돼. 뜻 한 바 때문에 깨질 줄 아는 놈, 난 그런 놈이 현자라고 본다. 포기해. 너한테 물려주려고 부왕(父王) 가슴에 대못 친 게 아니다.”


대하드라마 ‘대왕세종’에서 나오는 대사로,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양녕대군은 자신이 양녕을 대신할 세자가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효령대군에게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앙녕대군은 다음 세자는 흠집 하나 없는 효령이 아니라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진 충녕(훗날 세종)이 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충녕은 양녕의 말대로 많이 깨진다. 그래서 좌절도 많이 한다. 반면 효령은 그야말로 꽃가마만 탔다. 양녕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지도자가 한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드라마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양녕이 효령에게 한 말은 지금 지리멸렬한 대한민국 보수를 재건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인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최근 보수진영에서 황교안 전 총리를 두고 말들이 많다. ‘간’ 보지 말고 빨리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좀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갑론을박이 일고 있는 것은 황 전 총리가 정치를 하겠다고 직접 선언하지도 않았는데도 차기 대권 선호도에서 범야권 후보들 중 선두에 오른 여론조사 결과 때문이다.


황 전 총리가 대통령 선호도 1위를 하고 있는 것은 보수층이 그를 탄핵정국에서 이탈한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계파에서 자유로운 외부 인사인데다 대통령 탄핵으로 갈 길을 잃어버린 보수 세력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말이다.


법무부 장관과 총리, 그리고 탄핵으로 인한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 보인 그의 절제된 언행과 안정감도 보수층에게 강하게 어필한 듯하다.


사실 황 전 총리는 지난 대선 때도 보수층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간’을 본다는 부정적 지적도 있었지만, 이것이 향후 대권 가도의 최고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참신성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하다. 그동안 보수층은 이런 저런 카드를 다 써보았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런 면에서 황 전 총리는 안 써본 카드로 가장 매력적일 수 있다.

이로써 황 전 총리는 보수층에게 어필할 필요조건은 다 갖춘 듯하다. 문제는 충분조건이다. 그는 ‘정치’를 안 해본 사람이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검증에, 공격이 쏟아지는 등 위기가 닥칠 것인데 황 전 총리가 과연 그 위기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의 등판 시기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주장과 매를 먼저 맞으면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처럼 중도에 포기할 수 있으니 기다렸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등판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황 전 총리는 최근 “상처 입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반 전 총장과는 달리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를 풍기는 듯한 발언이다.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이 적기(適期)가 아닌가. 지지율 1위가 “보수 통합하자”라고 외친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통합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보수민심이 가만 두겠는가.

지금 ‘보수통합’보다 더 나은 명분이 어디 있나. 물론 통합을 둘러싼 진통은 다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황 전 총리는 그것을 해내는 능력을 보여줘야 대권도 잡을 수 있다. 뜻 한 바 때문에 깨질 줄 아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정치판에 얼씬도 안 하는 게 낫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졌던 홍준표 전 대표도 현실 정치 재개를 선언했다. 뜻 한 바가 있기에 돌아왔다고 했다.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지금까지 ‘간’ 보는 정치는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깨지지 않거나 목숨을 걸지 않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대통령이 된 사람은 사실상 없었음을 황 전 총리는 알아야 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