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과 겸손’통해 초석 마련

유교 문화권에서 어머니의 이상형은 단연 맹자의 어머니 ‘맹모’를 꼽는다.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은 물론, 공부를 중도 포기한 아들에게 베틀의 실을 끊어 경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다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기업인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키웠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최근 출간된 (한결 미디어 펴냄)은 이런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다. 이에 일요서울은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어머니 한성실 여사를 필두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들의 가르침을 연재할 예정이다. 다음은 코오롱 그룹 이웅열 회장의 어머니 신덕진 여사의 이야기다.

1944년 1월의 추운 겨울날이었다. 포항 신병옥 어른 댁의 무남독녀 신덕진이 맞선을 보았다. 입대 날짜를 꼭 2주일 남긴 청년 이동찬과의 상면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할 염치도 없는 처지의 청년은 마주 앉은 신붓감의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맛선 자리를 끝냈다. 신덕진 처자는 이동찬 총각이 입대 날짜를 받아놓았다는 것도 모르는 채 맞선 자리에 앉은 터였다. 이무렵 조선의 젊은이에게는 징병이나 지원병 문제가 고민거리였다. 이동찬에게도 이런 시련은 비켜가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의 정을 모르고 자랐지만, 아들 이동찬은 그래도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만약 이동찬이 입영을 거부할 경우 사업을 하고 있는 아버지가 무슨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동찬은 입영을 결심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뜻밖의 제의를 했다.

“입대를 하려거든 먼저 장가부터 들어라. 네가 군대에 가고 없으면 네 어머니 혼자 쓸쓸할 테니, 며느리가 옆에서 말동무라도 되어드리면 좋지 않겠느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 때문이라고 아들은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무관심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었다. 그것이 늘 불만이던 동찬 으로서는 ‘어머니를 위해 결혼하라’는 아버지의 뜻만으로도 감격에 겨웠다. 어머니는 이때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학도병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들의 혼사를 치를 것을 결심 한 것. 어머니는 할머니와 함께 귀국해 며느릿감을 수소문에 나섰고, 입대 날짜가 꼭 2주일 남은 어느 날 드디어 선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바쁘게 서둘러 결혼식이 치러졌다. 신혼 여행지인 동래온천에 도착해서야 신랑은 신부 신덕진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때 신랑 이동찬의 나이는 스물셋, 신부는 스물 둘이었다.

짧은 신혼여행을 마친 뒤, 신랑은 일본으로 가는 연락선을 타야했다. 학도병으로 전선에 끌려 나가게 되었다는 신랑의 고백에 새색시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결혼 1주일 만에 신랑이 학병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진작 그 사실을 알았다면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입대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사기를 당한 느낌이었어요” 그때의 일을 얘기하는 신 여사의 말에서도 신부가 느꼈을 충격이 어땠을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렇듯 남편 이동찬은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감춘 채 결혼한 것을 늘 미안해했다. 그래서 아내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겠노라는 마음속 다짐을 더욱 굳게 했는지도 모른다.


입대 후에도 집안 챙겨

1월 20일, 결혼 1주일 만에 이동찬은 조선학도지원병으로 입대했다. 새색시 신덕진은 시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남았고, 시아버지는 일본으로 돌아가 군수업체로 지정된 방직회사 경영에 전념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신랑은 전선으로 보낸 어린 신부 신덕진. 그 애틋한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전선으로 나간 신랑 이동찬은 새색시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서쪽 하늘을 보며 나뭇잎과 들국화 말린 것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지만 이동찬은 여전히 일본 군대의 막사 안에 있었다. 소위 임관식도 치렀다. 패전의 혼란 속에서도 이동찬은 일본군 예비 장교로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이 패망한터에 이대로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이동찬은 9월에야 귀국선에 올랐다. 집을 떠난 지 20개월만이다. 부산에서 기차를 갈아 탄 이동찬은 어머니와 아내가 기다릴 대구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머니는 죽음의 땅에서 돌아온 아들 동찬의 얼굴을 연신 어루만지며 부둥켜안고 울었다. 새색시 신덕진은 반가운 내색조차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가슴에 전달되는 가동이 얼마나 아릿하니 저려왔는지도 모른다. 신덕진 새댁은 남편이 입고 온 군복과 그동안 남편이 전선에서 보내온 편지를 모두 불살랐다. 다시는 이런 이별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소박한 가정부인

평생을 살면서, 신 여사가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아들을 낳는 문제였다.

넷째까지 딸이었다. 다섯째에 아들(웅열,코오롱그룹 회장)이 나왔다.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섯째도 딸이었다. 그렇다고 신 여사가 딸들에게 소홀한 것은 아니었다.

신 여사는 일제 강점기에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다고는 하나, ‘소박한 가정부인’이었다. 남편의 회사에 전화 한 번 건 적이 없을 정도로, 남편의 바깥일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남편이 집안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내조를 다했다. 신 여사는 1남 5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낸 어머님이자, 효심 또한 남달라 시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며느리였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4대가 성북동 한울타리에 모여 살며 즐거움을 누리던 시기도 있었다.

살림 솜씨 또한 야무진 편이다. 남편 이동찬 회장도 여느 샐러리맨처럼 매달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나 개인 용돈은 비서에게 맡겨두었다 꺼내 썼다. 신 여사 손에 한번 들어가면 그 돈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할 수없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 회장님 처지도 여는 월급쟁이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 여사는 며느리를 딸처럼 편하게 대하고, 또 부부간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딸이나 며느리도 똑같은 ‘한 명의 여자’라는 마음을 가졌기에 며느리에 대한 신 여사의 배려는 더욱더 진정성이 있어 보인다. 신덕진 여사의 가족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여자들이 많다. 어머니 신덕진 여사, 딸 다섯, 며느리 하나. 신 여사만 빼고는 여성이 모두 이화여대 출신인 것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딸 다섯과 며느리가 모두 동문인 셈.

2004년 1월 13일, 신덕진·이동찬 부부는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식을 치렀다.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가족과 친지가 참석한 가운데 전통 혼례 절차에 따라 예를 올린 것이다. 이날 자리에서 이동찬은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도 신덕진·이동찬 부부는 금슬이 남달리 좋은 것으로 소문나 있다”고.

행사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영상물의 제목처럼 신덕진 여사 내외의 지난 삶은 ‘아름다운 세월, 특별한 기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정리=이범희 기자> skycros@dailysun.co.kr
[자료제공:한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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