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아니 되옵니다”를 무려 300번이나 외친 위징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중용했다. 그의 정직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위징은 언제라도 목에 칼이 들어올 수 있는 위험한 직책을 맡고 있었으나 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신으로 기록됐다.

우리 조선시대에도 위징에 비교될 인물이 있었다. 세종 때 황희, 맹사성과 함께 3대 정승으로 일컬어지는 허조가 그런 인물이었다. 사가들은 그를 조선의 예학, 법 제도, 인사, 행정의 틀을 완비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임금에게 “아니 되옵니다”를 수 없이 외친 굳은 신념과 무너지지 않는 원칙의 소유자였다. 그의 간언은 세종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현실에 제대로 적용하고 실용적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어 정책 실패의 가능성에 대비하자는 취지였다.

허조는 왕이 법과 예, 제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침묵하지 않고 소신에 찬 반론으로 왕의 독단을 제어했다. 침묵하는 것은 신하의 역할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용기로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허조가 그같이 명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이 신하들과의 소통을 더욱 중시한 결과일 터다. 세종이 귀에 부드럽고 입에 달콤한 말만 듣기 좋아했다면 허조는 단칼에 처형되었을 지도 모른다.

반면 연산군은 무오사화 이후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며 집단상소를 올리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제거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가 반정으로 폐위 당하는 비운의 역사를 만들었다.

이렇듯 신하들의 간언을 경청하고 받아들인 최고 권력자들은 성군이 되었으나 그렇지 않고 주위를 온통 간신들로만 채운 왕은 퇴출당하고 말았다.

당태종 이세민과 세종은 또 어느 시기 자신의 정적이었던 인물들을 중용해 왕권을 극대화하고 국가도 크게 번성케 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세민은 자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황태자 이건성에게 여러 차례 권유했던 위징을 최측근 요직에 앉혔고 세종은 자신의 즉위를 한사코 반대하다 유배된 황희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조선조 최고 재상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반정으로 등극한 정통성 결여의 광해군은 폐모살제(廢母殺弟)와 명나라 사대라는 이념 논쟁에 휘말리면서 스스로 비극을 초래했다.

현 정부 경제 정책에 “아니 되옵니다”를 외친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장관이 결국 경질됐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청와대와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경제 수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정부 내 다른 모두가 “예스”라 했지만 홀로 “노”라고 한 그가 청와대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현 관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선 선조 때 조헌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의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 정벌의 길을 열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강요했을 때 충청도 옥천에서 상경하여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며 죽기를 각오하고 지부상소(持斧上疏·‘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를 올렸다.

그로부터 270여 년이 지난 고종 때에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이 이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면서 도끼를 들고 고종에게 지부상소를 바쳤다.

안정과 국가 발전을 위한 협치는 사라지고 여야가 극한 대립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념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 ‘충성스런 반대자’는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에 대한 포용은 손해가 아니라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간단한 사실을 방기하는 우(愚)가 반복되고 있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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