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베네수엘라의 케빈 라라 루고는 학교에서 개근상을 타는 등 공부도 잘하는 씩씩한 16세 소년이었다. 그러나 케빈은 사회주의 좌파 정권의 실정으로 홀어머니 야밀리에 루고가 직장을 잃으면서 며칠씩 굶어야 했다. 뉴욕타임스 2016년 12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케빈은 승용차도 없고 버스 삯 도 없어 어머니와 함께 45분 걸어 나가 유카(yucca)속(屬)의 식물을 채취해 연명했다. 케빈 어머니는 쓰디쓴 유카의 독성을 알면서도 삶아 말린 뒤 독성을 제거, 유카로 끼니를 때울 수 밖에 없었다.

2016년 7월25일, 케빈의 생일 하루 전 날 이었다. 케빈은 3일째 굶었다. 굶주린 빈속에 유카를 삶아먹었다. 그날 밤 11시 30분부터 케빈 가족은 격렬한 위통으로 구토하기 시작했고 케빈이 더욱 심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위를 세척하고 해독 정맥주사를 맞으면 회복될 수 있었으나 병원 갈 승용차도 버스 삯도 없었다. 한 시간 동안 수소문 끝에 이웃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 당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케빈은 병원 응급실 복도에 누운 채 여러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간호사의 처치를 받게 되었으나 간호사는 정맥주사 해독제가 다 떨어졌다면서 밖에 나가 사가지고 오라는 퉁명스러운 말밖에 없었다.

국가 경제 붕괴로 병원에는 정맥주사액만 떨어진 게 아니다. 수도 물 도 나오지 않아 환자를 수술하고 피로 젖은 수실대를 씻어내지 못할 때도 있다. 이 정맥수사 값은 4달러로 한국 돈 4천500여 원이었다. 하지만 케빈 어머니에게는 4달러가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 케빈의 위는 식중독으로 돌처럼 단단히 굳어갔고 그의 입에서는 검은 액체가 줄줄 흘러 나왔다. 케빈은 끝내 26일 생일 날 새벽 4시 45분 고통 속에 숨을 거뒀다.

배가 너무 고팠던 케빈은 병원으로 향하던 위중한 상태에서도 자기 생일날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이웃집에서 얻어다 놓은 케이크 한 조각을 떠올렸다. 케빈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 생일날 부모님이 꼭 케이크를 마련해 주셨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케빈 어머니는 귀여운 아들 케빈 생일에도 케이크만은 어떻게든 구해주어야 한다며 수소문 끝에 케이크 한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케빈에게 생일날 아침에 주겠다고 했다. 케빈은 병원으로 가면서도 다음 날 아침 생일날 먹게 될 케이크를 잊지 않았다. 케빈은 어머니에게 “엄마 내일 병원에서 돌아와 케이크를 먹을 께요” 나직하게 말했다. 케빈의 7월 26일 마지막 소원은 살아서 돌아와 엄마가 얻어 온 케이크를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공부도 잘하고 성실했던 케빈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케빈 방에는 케빈이 학교에서 탄 상장과 교복만이 홀로 걸려 있다.

16세 소년 케빈을 죽인 건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이었다. 이 나라는 석유 매장량이 세계 1위로 남미의 부자나라였다. 하지만 유고 차베스와 그의 뒤를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의 좌파 정권은 베네수엘라를 세계 최빈국으로 망쳐 놓았다. 그들은 정권 유지와 득표를 위해 무상교육, 무상의료, 저소득층 무료 식품, 무료 학생 노트북 지급 등 퍼주기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펴며 국고를 탕진했다. 반미를 외쳐대고 기간산업도 국유화했다. 산업 국유화 조치로 생산성이 떨어졌고 원유 생산은 절반 이하로 줄었으며 생필품은 품절되었다. 인플레는 2018년 8월 기준 연간 3만2천714%에 달했다. 베네수엘라 국민 3천200만 명 중 300~400만 명이 국외로 탈출했다. 빈손으로 베네수엘라를 떠난 여성들은 타국에서 가족을 부양키 위해 몸을 팔기도 한다.

생일날 케이크 한 조각 먹는 게 소원이던 케빈의 죽음과 타국에 나와 몸을 파는 여인들의 비극은 좌파 정권이 가져온 재앙이었다.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상기하면서 대한민국의 좌파 퍼주기 포퓰리즘 독성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통감한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