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아프리카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다
전두환 대통령,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아프리카 순방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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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대사가 근무할 당시 새뮤얼 도 라이베리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오게 됐나?

▲ 말씀드린 대로 새뮤얼 도 대통령은 상사 출신이다. 세계 역사상 사병만으로 조직된 집단이 쿠데타에 성공한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다. 도 대통령은 원주민 출신 첫 번째 대통령인데, 톨버트 대통령을 암살하고 쿠데타로 집권을 했으며 집권 과정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각료들도 많이 살해했고, 그 사실이 BBC방송에 방영돼 세계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았다.

대통령으로 취임하면 아프리카 대륙에서 제일 먼저 방문하는 나라가 나이지리아다. 나이지리아는 인구도 많고 석유도 나기 때문에,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국가다. 도 대통령이 쿠데타에 성공한 후 나이지리아에 방문 요청을 했으나, 셰후 샤가리 대통령이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지른 사실을 이유로 방문을 거부했다. 그래서 도 대통령은 한국 방문을 선택했다. 

우리 정부는 그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만약에 한국 방문을 수락하지 않으면 북한 공관을 개설하겠다는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다. 도 대통령이 남북 분단을 이용하는 틈새외교를 펼친 거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이었다. 당시 라이베리아는 인민구제위원회라는 일종의 군사위원회가 통치하는 기간이었고, 위원회 간부들 대부분이 함께 방한을 했다. 방한 선물로 우리나라는 경협 지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에서도 대통령에게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도 대통령은 중학교만 나온 지도자이므로,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 후 내세운 민정이양 공약을 평가하고 공약을 이행토록 한다는 명분으로 서울대학교가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당시 한국에는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 새로운 시책의 하나로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고, 이는 상당히 성공적이고 긍정적인 조치였다. 도 대통령은 방한 중에 한국에서 통금 해제 결과 성과가 있었음을 알게 되어 귀국해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통금을 해제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또 하나 특기할 것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실을 언론이 톱뉴스로 다뤘다.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수여가 도 대통령에게는 최고로 영예스러운 조치가 됐다. 그 후 죽을 때까지 박사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사용했다. 닥터 새뮤얼 케니언 도 최고사령관, 국가원수이자 인민구제위원회 의장이라는 호칭이 정형화됐다. 

서울대학교 박사학위가 그만큼 도 대통령에게는 소중하게 인식되어 효과가 컸다고 볼 수 있다. 박사학위를 주는 것도 외교의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 새뮤얼 도 대통령이 남북한 분단이 제공한 기회를 영민하게 활용했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이 아프리카를 순방하면서, 순방국 가운데 첫 번째로 선택한 나라가 나이지리아였다. 그때 대사가 잠시 나이지리아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한 것으로 안다. 당시 어떤 일화들이 있었나?

▲ 한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방문한 사람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한국이 중견국가, 또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범 국가가 됐다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죠.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국가다. 인구도 1억 명이 넘고 석유도 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아프리카의 지도국가라고 볼 수 있다.

- 아프리카의 맹주국이지 않나?

▲그렇다. 그것이 나이지리아를 방문국으로 선정한 배경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역사상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어서 두 달간 업무 지원을 나갔다. 나이지리아는 연방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 원수가 오면 수도 라고스를 방문하고 나서 반드시 연방 주의 하나를 방문하는 것이 관행이다. 

당시 셰후 샤가리 나이지리아 대통령은 민간 대통령으로 굉장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셰후 샤가리 대통령을 라고스에서 만난 후 연방 주의 하나인 베누에주를 방문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베누에주 담당자였다.

당시 나이지리아에 임동원 대사와 박건우 공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정상 방문 준비과정에서 통신 문제 때문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오랜 기간 식민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이웃 나라 간에 통신이 잘 안 된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의전은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의전이 엄격했다. 모든 것을 완전히 갖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지방 정부 방문 행사를 담당해 준비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한마디로 아주 죽을 고생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방문이 별 탈 없이 이루어졌다. 대통령 방문은 아프리카와 관계가 좋아지는 계기가 됐지만, 우리 외교관들에게는 큰 고충을 겪게 한 행사였다.

아프리카 지역은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의 위험은 물론 근무 환경이 여러 면에서 열악하기 때문에, 선진국들은 외교관들이 아프리카에서 2년 이상 근무하지 않도록 배려 조치를 한다. 2년 이내에 교체를 해 준다. 건강상 이유로 그런 관행이 확립되어 있고 임기를 마치면 휴가도 길게 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불편한 것을 전혀 못 느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도 최소 3년 정도를 무조건 근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바람에 저도 2년 후에 이임할 생각을 했는데 3년 가까이 있게 됐다. 그 지시 때문에 아프리카 지역에서 근무하는 외교관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남북한이 외교적 대결을 위해 큰 외교비용을 지불했다. 북한은 우리를 상대로 경쟁했기 때문에 더 큰 부담을 감수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당하는 난관은 상당 부분 낭비적인 대결 외교 부담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한때 동서냉전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는 맹주국이던 소련이 해체된 요인 중 하나도 공산 진영의 지도국가로서 막대한 비용 부담을 떠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에 부치는 출혈 외교를 한 거다. 

북한이 지금 난처한 지경에 처한 원인 중 하나가 자기 능력에 비해 과도한 외교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제력을 키워놨기 때문에 아프리카 외교에서 북한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아프리카 외교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1975년 UN에서 한국 문제 상정을 포기한 것이다. 지금은 남북한 모두 아프리카에서 출혈 외교경쟁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잠재력을 무시할 수 없어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5월 에티오피아·우간다·케냐 등 아프리카 3개국을 순방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고생도 했지만, 외교관으로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큰 씨앗이 된 경험을 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한민국 남자들은 국가 병역 의무를 완수할 때 자부심을 느낀다. 외교 측면에서도 오지 근무를 함으로써 국가관을 투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된다. 아프리카 지역 근무를 마치고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오지 근무를 상당히 보람으로 생각한다. 선진국 근무가 갖는 장점도 간과할 수 없지만, 아프리카와 같은 오지 근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남자들이 전역 후에 군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는 것처럼, 외교관도 오지 근무를 하면 이야깃거리가 많고 떳떳해진다. 더불어 정신력도 강화되고 자부심을 크게 느낀다. 오지 근무가 외교관 생활에 극기심을 기르고 자긍심을 갖게 해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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