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31)
삼 불 망(三不忘) - (31)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11-26 14:19
  • 승인 2018.11.26 14:22
  • 호수 1282
  • 6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충선왕을 만나러 감숙성 타사마까지 가다

그해(1323년) 2월 말일. 마침내 이제현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어 원나라 황제가 교지를 내렸다.

‘충선왕을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양이(量移, 먼 지방에 좌천하였던 관리를 대사령으로 인하여 근처로 옮기는 것)하라.’

이제현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먼 길을 마다 않고 단신으로 감숙성 타사마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그 여행은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때문에 만권당에서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많은 중국학자들이 이제현의 장도(壯途)를 걱정해 줬다.

4월 20일. 이제현은 행장(行狀)을 꾸렸다. 그리고 아시아 대륙 서쪽 끝에 있는 히말라야의 설산 산자락으로 표표히 길을 떠났다. 동행하는 인원은 호위 무사 3명과 행장을 싣고 나를 마부 1명이 고작이었다. 그 중에는 해월이가 이제현의 안전을 위해서 추천한 젊은 무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무사의 이름은 이후혁이었는데, 청주지방에서 활을 제일 잘 쏴 백보천양(百步穿楊)이라고 불리었다. 백보천양은 고구려 동명성왕 주몽처럼 백보 밖에서 버드나무 잎사귀를 꿰뚫을 정도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제현은 먼 길의 첫걸음을 내딛는 심정을 읊어 충선왕에 대한 충정을 노래했다.

님의 은혜 만에 하나 갚지 못했으니

만 리 넘어 달려가기 어렵다 말하랴!

타사마까지의 원행(遠行)은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고된 행군이었다. 그러나 타사마를 방문해서 또 한 번 중국의 외진 절경과 사적을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는 설렘은 고된 행군을 잊게 해 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제현은 ‘장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니(壯士一去兮 不復還 장사일거혜 불복환)’라고 노래한 형가(荊軻, 전국시대의 자객)의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타사마까지의 길은 충선왕이 유배 갔던 코스 그대로, 연경 - 탁군 - 석가장 - 정주 - 서안 - 난주 - 타사마 과정이었다. 이제현은 연경 남쪽에 위치한 유비의 고향인 탁군(郡) 탁현(縣)에 머물러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劉備)를 회상했다.

유비가 탁현에서 궁하게 살았는데, 그 집 문 앞에 뽕나무가 우보(羽, 임금의 수레에 덮는 일산)의 모양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유비가 어릴 적에 아이들과 놀면서, “내가 장래 일산으로 덮는 수레를 탈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더니, 뒤에 과연 촉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다.

잠시 회상에 잠겼던 이제현은 유비가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 촉나라 밖을 나오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유비를 추모하는 <탁군(郡)>이라는 시를 지었다.

美壤每每接太行(미양매매접태행) 아름다운 땅(탁군)은 늘 태행산과 닿아 있어

東秦右臂北燕項(동진우비북연항) 동쪽은 진나라의 오른팔이요 북쪽은 연나라의 목이라.

劉郞却愛蠶叢國(유랑각애잠총국) 유랑(유비)은 도리어 잠총국(촉나라)을 사랑하여

故里虛生羽桑(고리허생우보상) 그 고장에 우보의 뽕나무가 헛되이 났었네.

탁현을 떠난 이제현은 석가장, 정주를 지나 함곡관의 장안(長安) 여관에서 하루 밤을 묵었다. 그는 여기에서 <장안 여관에서>라는 시 한 수를 지었다.

車馬函谷關(거마함곡관) 말과 수레 오고가는 함곡관 길에

風塵季子(풍진계자구) 몰아오는 먼지가 갓옷에 쌓이누나.

轍環天下半(철환천하반) 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

心遂水東流(심수수동류)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 향하누나.

타사마를 가기 위해서는 섬서성 건현(乾縣) 일대를 지나야 하는데, 측천무후(則天武后) 의 묘가 화양역 서북쪽에 있었다. 이제현은 여기서 <측천무후묘>라는 시 한수를 남겼다.

구양공(구양수)이 진실로 이름난 선비지만

필삭(筆削, 가필하고 지워버림)엔 잘못을 면하지 못했다네.

어떻게 주나라 남긴 것 가지고

당나라 일월(日月, 황제나 황후)을 더럽혔는가.

이제현은 시의 서문에서 구양수(歐陽脩, 북송의 시인)를 추상같이 비판했다.

송나라의 구양수(歐陽脩)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인 측천무후를 당기(唐紀) 속에 열거하였으니, 대개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의 잘못을 답습하였으나 더 잘못했다.

여후(呂后, 한나라 고조의 황후)는 비록 천하를 마음대로 했으나, 그래도 어린 아들들을 명분으로 한(漢)나라가 있음을 보였다.

측천무후는 당나라를 고쳐서 주(周)나라로 일컬었으며,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연호를 제정하였으니 불충한 반역을 범했다. 당연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만세에 알려야 하나 도리어 이것을 존숭하는구나!

당기라 일컬으면서 주나라 연호를 쓴다면 옳은가? 역사서를 지으면서 《춘추(春秋)》를 본받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옳다고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

이제현은 측천무후의 묘를 떠나 몇 달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힘든 행군을 계속했다. 그해 5월 중순. 이제현 일행은 섬서성 난주를 벗어나 감숙성 서녕(西寧)으로 접어드는 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이곳만 무사히 지나면 돈황(敦煌)과 타사마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갈래 길을 만나게 된다.

일행은 잠시 지친 말을 쉬게 하려고 병풍처럼 둘러싸인 고목나무 아래 평평한 장소로 들어섰다. 이제현은 바위에 앉아 멀리 뭉게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바라보며 충선왕과 고려를 생각했다. 그리고 연경에 두고 온 그리운 해월이를 떠올리곤 이내 도리질을 했다.

‘선왕을 뵈러 가는 길인데 삿된 생각은 안 된다.’

이제현이 굽혔던 허리를 펴려고 일어서던 찰나였다. 갑자기 100여 보 앞에 말을 탄 십여 명의 군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일행을 에워쌌다. 저희들끼리 뭐라 지껄이며 칼을 목에 들이대는 바람에 이제현은 주춤했다. 호위군사 세 명이 이제현의 앞을 가로 막았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의 행색으로 보아 도적떼는 아닌 것 같아 일단은 안심이 되었으나 산중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현은 사나운 눈매로 떠들며 대드는 그들의 언어가 몽골 말이 아니라는 점, 그들이 들고 있는 칼이 장창이 아니라 초승달처럼 휘어진 단도라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장인 듯한 자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제현의 당당한 태도에 주눅이 들었던지 대장은 앞으로 나와 이제현과 마주섰다. 이제현은 그 자가 보는 앞에서 막대기를 꺾어 땅에 글을 써 보여 주었다. 이제현이 그에게 써 보여 준 글의 요지는 이러했다.

“나는 연경에서 원 황제의 칙명을 받고 타사마로 고려의 충선왕을 배알하러 가는 고려 조정의 관원이다. 그대들을 보건대 동호(東胡)의 후손임이 분명한데, 고려와 그대들은 본시 한 조상을 섬기던 북방의 기마족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길을 막고 행패인가.”

이에 대장은 놀란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 조정의 정규군으로 지방 수비의 역할을 하고 있소. 원래는 신강(新疆)지역에 살아온 위구르족의 후예지만 지금은 원에 복속되고 말았소. 대감의 말을 들으니 고려와 위구르는 동조(同祖)를 모신 동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소. 더구나 황상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분들에게 잠시나마 폐를 끼쳐 송구스럽게 생각하오. 넓은 양해를 바라오.”

이 말을 들은 이제현은 장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 그대들 타타르인들의 용맹과 기개는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지금은 비록 세가 불리하여 그대들과 고려가 원에 복속되었으나 머지않아 독립 번영의 기틀을 다시 갖출 날이 올 걸세. 부디 자중하고 힘을 기르시기 바라네.”

이렇게 하여 일행은 이제현의 재치와 인품 그리고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수비대장은 물과 밀가루 전병과 육포를 한 두름 일행에게 건네주고 타사마 길로 접어드는 곳까지 호위해 주었다.

3년 만에 이루어진 군신 간의 해후

그로부터 5일 뒤.

마침내 이제현은 충선왕이 티베트의 살사결에서 이배(移配)된 감숙성 타사마(臨임요)에 도착했다. 타사마는 고산지대인 티베트의 여느 도시처럼 나무가 많지 않고 주변 경관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해는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이 내려 사위는 정적으로 가득 찼다.

이제현은 말에서 내려 마부와 호위 무사들을 뒤로 하고 대문을 걸어서 들어갔다. 황량한 마당 안에는 달빛만 가득하고,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울려왔다.

이제현은 노복의 안내를 받아 충선왕을 배알하여 부복했다. 3년 만에 이루어진 군신 간의 해후는 비장하고 감격스러웠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충선왕을 시종하고 있던 직보문각 박인간과 대호군 장원지도 서러워서 함께 울었다.

사나이들의 통곡이 계속된 뒤에, 이제현은 눈물을 거두며 충선왕에게 말했다.

“상왕 전하, 그동안 옥체 만강하셨나이까.”

“외롭고 적막한 유배생활을 오로지 불경공부에만 전념하며 달랠 수 있었다네.”

“상왕 전하, 지난 3년을 잘도 참으셨사옵니다.”

“익재 공, 과인이 험난한 살사결에서 이곳 타사마로 옮겨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공이 애쓴 덕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한 것뿐이옵니다.”

“아닐세, 고려의 신하들이 한결같이 조변석개하는 변절을 다반사로 여기고 있는데 공만이 형세(形勢)가 아닌 대의(大義)를 좇고 있으니 정말 고맙네.”

“원 조정에서 상왕 전하의 유배지를 이배시켜 준 이면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사옵니다.”

“무슨 연유라도 있는가?”

“귀양세월이 2년 반이 넘었고, 임백안독고사가 팔사길을 매수하여 상왕전하를 중상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무엇보다도 고려의 들끓는 민심과 원나라 조정의 동정심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 같은가?”

“멀지 않은 시기에 상왕 전하께서 복권될 수도 있을 것 같사옵니다.”

“과인을 위로하는 이야기일 테지.”

“아니옵니다. 원나라 조정의 권력투쟁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건강에만 유념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지금까지도 어려움을 잘 견뎌왔지 않은가.”

“이렇게 상왕 전하를 모시게 되니, 고려의 국운이 오늘부터 새로 일어서는 것만 같사옵니다.”

3년 만에 이루어진 군신 간의 예가 끝나자 이제현은 심양왕 측의 입성책동을 소상하게 상주했다. 충선왕은 입성책동 전말을 보고받은 후 땅이 꺼져라 한탄하였다.

“어찌 불행히도 나의 대에 이르러 두세 간신의 꾀로 우리의 조업(祖業)이 무너지느냐. 조종(祖宗)이 무슨 죄로 다시 혈식(血食, 나라를 보존함)치 못하게 되느냐.”

“상왕 전하, 고려의 신하들이 못난 탓에 사직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제 비록 미력하나 충절 있는 대소 신료들과 원나라 조정의 어진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서 기필코 역적들의 망동을 저지하겠사옵니다.”

“익재 공, 태조 왕건 대왕이 지하에서 우리 고려를 지켜주실 것이네. 천명은 고려를 버리지 않을 것일세. 힘을 내어 고려 사직을 위해 분투해 주게.”


(다음 호에 계속)

 

“명심하겠사옵니다.”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