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2개월 후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 내에서 좌익 세력의 무장반란이 일어난다. 우리에게 ‘여순반란’으로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일부 시민단체와 민주평화당 일부 의원들이 ‘여순반란’을 ‘여순항쟁’으로 치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좌파 인사는 공중파 TV에 출연해서까지 ‘여순반란사건’을 ‘여순민중항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외쳤다. 또 어떤 역사학자는 반란이 성립하려면 “현 권력자를 축출하거나 제거하려는 계획이 있어야 하고 계획의 구체성과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 반란의 조건들을 갖추어야 한다”며 “주동자들인 14연대 군인들의 목적은 정부 전복도 권력 찬탈도 아니었으며, 그들은 반란의 조건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아무리 보는 시각이 다르더라도 이렇게까지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현실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 말대로 반란이란 정부나 지도자에 적대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의 혁명과업 6개항에 따르면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할 것과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했다.

또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하고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고 했다. 이것이 반란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 반란인가. 논란의 여지가 없질 않은가.

그런데도 이들은 이런 반란행위를 이승만이라는 부당한 권력에 맞선 ‘항쟁’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정부에 의해 진압된 반란군을 정부 권력에 희생된 자라고 주장한다. 역사 왜곡이 도를 넘어서 역사 뒤집기에 들어섰다.

물론 진압과정과 반란군 협조자 색출 작업 과정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에 대해서는 진상조사를 통해 응당 국가가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실체가 엄연했던 대한민국 전복 행위를 ‘민중항쟁’이라고 우길 수는 없는 일이다.

사건의 전모는 당시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개 대대 규모의 군인들을 파견하기로 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에 일부 군인들이 무장반란을 일으키고, 경찰 가족과 많은 우익 인사들을 살해하면서 여수를 점령했다. 반란군은 이후 순천을 장악한 뒤에는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곡성까지 점령했다.

그대로 놓아둘 경우 이들의 세력은 전국에 뻗칠 수 있는 국가 위기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가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을 명령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부가 진압 못했다면 반란군은 서울까지 올라와 ‘대한민국 분쇄’라는 혁명과업을 완수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반란 주동자 중 한 명인 이용구 남로당지구당위원장이 인민대회에서 한 발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남쪽에서 밀고 올라가고 북쪽에서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다가 마주치는 그 순간이 바로 조국이 통일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여순반란 사건’을 ‘민중항쟁’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 사회에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친북 활동이 봇물 터지듯 일어나 백주대낮에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백두칭송위원회’라는 단체가 북한 김정은의 서울 답방을 환영한다면서 “김정은 만세”를 외쳐대는가 하면, 친북 성향의 민간단체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김정은 환영단 참가 신청서를 받는 참담한 지경이다.

또 불교인권위원회라는 낯선 단체는 내란 혐의로 실형을 살고 있는 이석기 전 통진당 의원에게 불교인권상을 수여한 뒤 “이 전 의원을 비롯한 모든 양심수들은 석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라 돌아가는 사정이 이 같은데도 이를 규탄하는 다중(多衆)의 목소리가 애써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이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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