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버츠 미국 연방대법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꾸짖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9연방순회법원의 존 티거 판사를 공격한데 대한 반격이었다. 티거 판사는 트럼프 대통령이 발표한 중남미 이주민들(캐러밴)의 미국 망명 금지 포고문을 위법이라고 11월21일 판결했다. 티거 판사의 위법 판결에 화가 치민 트럼프 대통령은 티거의 판결이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그건 법이 아니다.’고 트위터를 통해 공격했다. 이어 트럼프는 티거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며 적폐 청산 대상인 듯 몰아세웠다. 티거 판사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연방판사로 임명된 탓에 자신을 반대한다는 푸념이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트럼프의 티거 판사 공격 다음 날 즉각 트럼프에 반격하고 나섰다. 그는 성명을 발표,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나 트럼프 판사가 없다. 부시 판사나 클린턴 판사도 없다. 우리에겐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인 판사들이 있을 뿐이다. 독립적인 사법부는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중요한 것”이라며 트럼프의 ‘독립적인 사법부’ 침해를 나무라며 판사의 권위를 보호하고 나섰다.

미국은 자유민주 국가들 중에서 3권분립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다. 미국은 프랑스의 샤를 몬테스큐가 1784년 출판한 ‘법의 정신’ 대로 3권이 온전히 분립되어 있다. 몬테스큐는 행정·입법·사법 3개의 권력 중 2개가 한 사람이나 한 그룹에 의해 장악되면 독재로 전락된다고 경고 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이 트럼프의 판사 공격을 정면 꾸짖고 나선 것도 대통령을 견제하고 3권분립 원칙을 지키기 위한데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선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 앞에서 사법부의 잘못을 아랫사람처럼 질책했고 대법원장은 옳은 말씀에 “협조” 하겠다며 머리 숙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9월 13일 대법원 축사에서 그런 군림현상은 드러났다. 문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식 축사를 통해 “지난 정권의 사법농단 의혹이 사법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질책하며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면서 의혹 규명을 독촉하였다. 이어 그는 “만약 잘못이 있었다면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훈계하기도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문 대통령의 의혹 규명 독촉과 질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며 허리를 굽혔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부에 쌓여온 폐단을 근원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지금 저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임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며 상급자의 지시를 받는 하급자 자세를 연상케 했다. 3권분립 국가에서 행정부를 견제해야 할 사법부 수장이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행정부 수장에게 양도한 셈이다.

일부 변호사들은 문 대통령이 특정 사건과 관련해 검찰과 사법부에 사실상의 지침을 내리고 대법원장이 그에 따르겠다고 머리를 숙인 것은 “군사정부에서도 보기 어려운 일”이라며 개탄했다. 그 밖에도 “제왕적 대통령이 삼권분립에 기초한 사법부 독립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언을 했는데도 대법원장이 박수를 친 격”이라고 분노했다.

김 대법원장은 문 대통령의 제왕적 대통령 훈계에 머리 숙임으로써 사법부가 행정부에 깔려 있음을 엿보게 했다. 사법부의 권위가 계속 떨어지다 보니 사법부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출근 길 김명수 대법원장의 관용차에 화염병을 던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김 대법원장은 미국 대법원장처럼 문 대통령에게 “독립적인 사법부는 … 중요하다”며 당당히 사법부 독립성을 강조했어야 옳다. 김 대법원장은 미국 대법원장의 11월 21일 자 성명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3권분립과 사법부의 권위를 지켜가기 바란다.

■ 본면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