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충선왕의 복권, 충숙왕의 왕위 회복

1323년(충숙왕10) 9월.

이제현이 타사마에서 충선왕을 모시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제현의 정세에 대한 예측은 예리하고도 정확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정변이 일어나 영종(英宗)이 21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고 태정제(泰定帝)가 제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태정제는 쿠빌라이의 손자이며 충선왕의 처남이었다. 태정제가 즉위하자 충선왕은 마침내 복권되었고, 충숙왕도 다시 왕위를 회복했다.

마침내 충선왕은 3년 2개월의 유배생활(타사마에서의 7개월 포함)에서 풀려나와 연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충선왕은 예전의 권세를 회복했으며, 그를 수행하는 이제현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이제현은 충선왕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원의 간섭 아래 신음하고 있는 조국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울분을 억누르며 수심과 충분(忠憤)이 넘치는 시를 남겼다. 그에게 시작(詩作)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다스리는 부적과 같은 것이었다.

만리라 고향 길 부모 생각에 눈물짓고
삼년 동안 임금 생각 애간장만 태우네.
시 읊으며 무료히 세월을 보내나니
주머니엔 시편만 가득 차누나.

연경에 무사히 돌아온 이제현은 타사마에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지은 한시 35수를 《후서정록(後西征錄)》이라는 시집으로 묶었다.

그는 친구 최해에게 《후서정록》의 서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최해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만 리 먼 땅을 가보지 못하고 만 권의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이면 두보(杜甫)의 시를 볼 수 없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의 얕은 식견으로 이렇게 훌륭한 시편을 본다는 것조차도 오히려 참담하지 않을까 두려운 판국에 서문을 써 달라고 하는 부탁은 도저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번 읽어보니 사의(詞義)가 차분하면서도 노련하였는데, 이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가 사물을 만나 감발(感發, 감동하여 분발함)한 것으로 형세상 그럴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경박한 말은 한 구절도 없고, 옛일을 회상하고 일에 대한 느낌을 읊은 것은 그 의미가 더욱 정묘하여 앞선 문인들이 가려워 하던 부분을 긁어준 것이 많았다.

주희가 일찍이 구양수의 시 한 연(聯)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시로 말해도 제1등의 시요, 의논(議論)으로 말하더라도 제1등의 의논이다” 하였는데, 나는 이 말에 또한 느낀 바가 있어 우선 이렇게 써서 그의 부탁에 답하는 바이다.

이제현이 원나라에서 가진 아미산, 보타산, 타마사를 오가는 세 차례의 여행은 거리만도 4만 킬로미터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세 번에 걸친 대륙횡단에서 이제현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워서 견문을 크게 넓혔다.

이듬해인 갑자년(1324, 충숙왕11) 정월. 충숙왕이 원나라 황제로부터 국왕의 인장을 돌려받고 환국했다. 충선왕을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양이(量移)하는데 공을 세운 이제현은 다시 정광대부밀직사사(靖匡大夫密直司事)를 제수받았다.

그해 4월. 충숙왕은 심양왕 왕고를 왕으로 세우자는 청원서에 서명한 자들을 모두 파면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임금의 녹을 먹으면서 두 마음을 품는 것은 신하가 아니다. 원나라에 글을 올려 심양왕 왕고를 고려왕으로 세울 것을 청한 자는 모두 녹봉을 정지하라.’

이제현은 충숙왕의 파면교서가 몰고 올 후폭풍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상왕(충선왕)에게 충숙왕의 교서에 대한 위험성을 바로잡기 위해 건의를 올렸다.

“상왕 전하, 소신은 조정의 권력투쟁으로 오늘과 같은 참담한 결과가 도래할 거라고 믿고 있었사옵니다. 사실 충숙왕과 심양왕 간의 권력투쟁은 원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에 기인한 바도 큽니다. 따라서 고려 신하들 중 심양왕 왕고 옹립에 관계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고로 ‘궁지에 몰린 새는 사람의 품속으로 날아들게 마련(窮鳥入懷 궁조입회)이고, 어진 사람은 그 새를 불쌍하게 여긴다(仁人所憫 인인소민)’는 말이 있사옵니다. 그러하오니 그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보복을 하는 악순환만은 막아야 하옵니다.”

충선왕은 자신도 원나라 조정의 권력투쟁으로 유배되었던 점을 생각하여 이제현의 건의에 따랐다. 충선왕은 정치보복의 피바람을 막기 위한 중재의 교서를 내렸다.

‘심양왕 왕고를 세우자고 청하는 글을 올릴 때 한두 간신의 꾐에 빠져 부득이 서명한 자는 과인이 국왕(충숙왕)을 타일러서 용서하라고 하겠다.’

역적 유청신과 오잠의 2차 입성책동을 분쇄하다
여기서 부원배 홍복원(洪福源)의 3대를 알아보자.

홍복원의 아버지 홍대순(洪大純)은 원간섭기에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뿌리 깊게 부원배 활동을 전개했다. 홍대순은 고종 5년(1218) 몽골군이 강동성(江東城, 평양 동쪽 강동군에 있던 성)으로 쫓겨 왔던 거란 잔당을 칠 때 마중 나가 몽골군을 받아들였다. 홍복원 역시 고종 18년(1231) 몽골의 1차 침입 때 서경 낭장으로 있으면서 살례탑(撒禮塔)에게 항복했다. 고종 20년(1233) 서경 땅을 몽골에 바치려고 반란을 일으켜 붙잡혔으나 몽골로 도망하여 동경총관이 되었다. 그 후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그 앞잡이가 되어 들어오므로 ‘주인을 무는 개’라고 하였다.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洪茶丘)는 원종 15년(1274) 원이 일본을 원정할 때 감독조선관군민총관으로 고려에 와서 갖은 횡포를 부렸다.

한편, 해를 거슬러 올라가 1321년(충숙왕8).

역관출신의 재상 유청신(柳淸臣)과 찬성사 오잠(吳潛)은 충숙왕을 따라 원나라 연경에 도착하여 ‘심왕 옹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원나라 태정제의 즉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자 목표를 전환하여 입성책동(立省策動)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역신(逆臣) 유청신과 오잠은 고려 사직을 원나라에 내놓으려 했다. 그들은 고려가 원의 ‘부마국가’로 존속하기보다는 아예 원나라의 일개 성이 되는 것이 자신과 가문의 영달에 득이 된다고 믿고 있었다. 1321년과 1322년에 걸친 유청신과 오잠의 입성책동은 해를 넘겨서 계속되었다.

1323(충숙왕10) 정월. 유청신과 오잠은 원나라 황제에게 입성책동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

‘요동지방과 고려를 한데 묶어 행성(行省, 행중서성)을 설치하여 삼한성(三韓省)으로 원나라 내지(內地, 본국)와 같이 하여 주시옵소서.’

고려의 국호를 폐하고 식민지로 만들자는 이른바 ‘제2차 입성책동’이었다. 입성책동은 당연히 원나라 조정의 뜨거운 화두가 되었다. 최초의 입성책동은 1309년(충선왕 1)에 요양행성 우승 홍중희(洪重喜, 홍복원의 손자)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그가 조주(潮州, 광동성 조안)로 유배됨으로써 입성 논의도 잠잠해졌다. 그러나 제2차 입성책동 논의는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정할 정도로 상당히 진전되었던 것이다.

유청신과 오잠은 구한말(1905년) 일제가 한국이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乙巳五賊,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과 다름이 없는 인물이었다.

당시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이제현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며 역적들의 망동에 분을 삭이지 못했다. 몇 년 동안에 걸친 두 역적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이들이 막상 고려를 배신하고 나오자 이제현은 징치(懲治)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고려의 독립국가로서의 기틀과 자존이 명재경각에 달려 있구나!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까. 고려 조정의 녹을 먹는 신료로서 이를 분쇄하지 못한다면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후세 사가들의 비웃음을 받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한 이제현은 분노의 마음을 안으로 삭이며 고려 사직과 평생의 지존인 충선왕을 위해 입성책동의 저지에 사력을 다할 방법을 강구했다.

먼저 연경의 만권당에서 닦은 학문과 경륜, 원나라의 유수한 학자들과 맺은 교분을 십분 발휘하여 난관을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그리고 고려 조정에 입성책동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올려 동조자들을 규합해서 그 힘을 바탕으로 원나라 조정을 움직이는 수순을 밟기로 했다.

위기는 항상 기회를 잉태하기 마련이다. 입성책동 분쇄를 위해 결단을 내린 이제현을 일약 구국의 영웅으로 만드는 기회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현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애써 억누르며 고려 조정에 간곡히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고려 400년의 토대가 유청신과 오잠의 입성책동이라는 망동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있습니다. 억조창생을 돌봐야 할 사직이 없는데 조정이 있을 수 없고, 조정이 없는데 신하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려의 모든 신하들은 떨치고 일어나 유청신과 오잠의 망동을 분쇄하는 데 뜻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그해(1323년) 12월. 이제현은 고려의 대신들이 국정을 잘 보필하도록 경계하는 내용의 교지를 내릴 것을 충선왕에게 건의하였으며, 교지를 직접 작성하였다.

‘짐은 11월 10일에 연경에 도착했고 13일에 원 황제를 만나보았다. 아직도 염려되는 것은 국왕이 연소하여 간사한 자들을 가까이하며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는 그 점이다. 그대들은 녹봉만 생각하고 국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러한 재상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조심하여 국정을 잘 보필토록 하라.’

고려의 운명은 이재현의 두 어깨 위에 달려 있었다. 이제현은 기민하고도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고려 조정에 입성책동을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데 성공한 후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원나라 조정에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충선왕이 티베트에 끌려갈 때 도망간 전력이 있긴 하지만, 충렬왕과의 권력투쟁에서 충선왕을 지킨 공이 있던 최성지(崔誠之)와 김정미(金廷美)가 그들이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에게 불충의 죄를 지은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제현은 고려 조정의 역할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간다고 생각하자 다음 수순을 밟았다. 원나라의 고려인 환관인 방신우(方臣佑)의 조력을 받기로 한 것이다.

방신우는 충렬왕 15년(1289)에 궁중의 급사로 있다가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수원황태후의 시중을 들어 평장정사가 되었다.

원나라가 삭방(朔方)의 번왕 팔로미사(八驢迷思)가 이끄는 무리를 압록강 동쪽에 이주시키려 하자, 방신우는 원 황제에 고해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고려는 땅이 좁고 산이 많아 농사와 목축할 곳이 없으니 북쪽 사람들이 편안히 살 만한 곳이 못 되며, 한갓 동민(東民, 고려민)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

이처럼 방신우는 원나라의 7조(七朝)와 두 태후를 섬기면서 국가 기무에 참여하여 고려 왕조를 위기 때마다 구한 숨은 공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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