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미국은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에 특별히 관심 많았다”
“한국의 발전은 곧 미국이 자랑하는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1987년 외교부 실무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에 임명됐다. 당시는 큰 변화와 격동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직선제 개헌을 통해서 노태우 정부로 권력이 이양됐고,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펼치며 한·소 간 물밑 교섭이 진행됐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관련해서 한·미 간 어떤 외교적 현안이 있었나?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은 외교관 실무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외교 사안을 다루는 자리다.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총무과장 선배 대부분이 워싱턴에서 근무했다. 

나는 1987년부터 1990년까지 주미대사관 정무 참사관으로 근무했는데, 전두환 대통령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대의원 투표에서 당선됐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외교의 역점도 역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홍보에 두고 전개됐다.

당시 김경원 주미대사는 박정희 대통령 때 외교특보로 활동했으며, 하버드대학교 출신이었다.  워낙 말을 조리 있게 잘하시는 데다 그 내용도 훌륭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서 워싱턴 외교가에서 인기가 있었다. 

나는 청와대 재직 시 김경원 특보가 외빈을 만날 때 자주 배석하면서 그분께 많은 것을 배웠다. 김경원 대사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정무참사관으로서 기쁨과 보람을 가지고 일했다.

미국에서 전두환 정부의 신임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는 단임제 약속 준수 여부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7년 단임제 대통령이 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단임 약속을 천명했고, 미국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이 과연 단임을 지킬 것이냐 안 지킬 것이냐에 주목했다.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목표는 국가안보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확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확산시키는 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의 민주주의 성공이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을 나타내는 것이며, 한국의 발전은 곧 미국이 자랑하는 모범적인 사례에 해당된다. 

당시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하느냐가 미국 대외 정책의 성공 여부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였다. 미국은 한국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성공 사례가 한국의 발전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단임을 지킬 것인지 여부가 주목의 대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를 연장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을 때마다 미국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기록을 보면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미국 국무장관이 제일 많이 방한했다. 당시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거의 매년 수시로 방한했을 거다. 미국의 수뇌부가 방한할 때마다 대한반도 안보 공약을 재천명하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단임 약속을 다시 받아가는 외교패턴이 되풀이됐다.

당시 주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의 주요 임무는 전두환 정부의 정통성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내가 재직하던 때 유성환 의원 제명사건이 발생했다. 

유성환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반공이 국시가 될 수가 없다는 소위 국시 발언을 했는데, 그것이 말썽이 된 거다. 유성환 의원은 그 발언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유성환 의원이 소속한 통일민주당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언론보도가 국내에 터졌다. 여기에 미국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국무부 아태 담당 차관보인 개스턴 시거 박사가 주미대사를 국무부 차관보실로 불렀다. 마침 김경원 대사가 미국 내 출장 중이라, 할 수 없이 한탁재 공사와 정무참사관인 내가 불려 들어갔다. 

만약에 한국 정부가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의 발언을 문제 삼아 소속 정당을 해체하는 조치를 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일이며, 미국 정부로서는 해체 결정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외교적 용어로 ‘반대한다’는 의미다.

-당시 미국 정부는 유성환 의원의 반공 국시 사건을 빌미로 전두환 정부가 정권을 연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것인가?

▲ 그렇다. 미 국무부에서도 미국의 입장을 통보받고 나서 보고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김경원 대사께 바로 전화로 보고하고, 외무부 본부에 빨리 사실관계를 즉시 보고하자고 했는데 공사님은 대사가 돌아온 후 평가와 함께 본부에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니 대사가 돌아오시는 밤까지 보고를 지연하자고 했다. 상사가 그렇게 하자니까 어쩔 수 없이 기다렸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청취 내용을 사전에 국정원 공사에게 전달한 것이 사단이 됐다.

-다른 라인으로 보고가 됐나, 무슨 문제가 발생했나?

▲국정원에 먼저 보고되어 안기부장인 장세동 부장이 최광수 외무장관을 불러 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정작 외무장관은 전혀 모르고 회의에 들어갔고 외무부가 보고한 사안을 가지고 대책을 논의하게 되어 최광수 장관이 당황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통일민주당 해체 조치를 검토한 적이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미국 측에 통보돼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수습과정에서 소외된 최광수 외무장관이 화가 나서 보고 지연을 이유로 주미공사가 소환 조치됐다.

내가 말하려는 핵심 요지는 미국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관여를 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 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 기적을 달성한 배경에는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한·미 동맹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제사회의 외교 관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국가의 성장과 발전은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미루어지는 것임을 재인식했다.

주미대사관 재임 중 특기할 일화가 또 하나 있다. 슐츠 미국 국무장관이 “만약 전두환 대통령이 단임 약속을 이행하면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같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미국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단임을 했다. 그렇게 극찬한 슐츠 국무장관의 발언을 본부에 보고한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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