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법 개정안 시행 이후 첫 사례

건설사들, 최대 28억 범행에 활용

홍보대행업체 9곳 총 293명 송치

신발장에 선물 슬쩍…각종 수법

건설사 직원, 홍보대행사 금품도

건설사 측은 여전히 "모르는 일"

연루 조합원 1500여명…9명만 입건

개포주공아파트 단지<서울=뉴시스>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재건축 시공사로 선정받기 위해 조합원들에게 금품·향응을 제공한 건설사와 홍보대행업체 직원들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이번 수사는 금품·향응을 홍보대행업체 등 용역업체를 통해 제공한 경우에도 건설업자가 직접 제공한 것과 동일한 기준으로 처벌하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개정안이 지난 10월 시행된 이후 첫 사례다. 그간 건설사들은 용역업체를 앞세워 금품을 제공한 뒤 문제가 발생하면 '꼬리자르기' 식으로 법적 책임을 피해왔다.

지난 11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서울 강남권 재건축 지역의 시공사 선정 총회를 앞두고 2억3000만원~28억원 상당의 금품·향응을 조합원에게 제공하거나 제공하려 한 현대건설 법인 및 직원 7명, 롯데건설 법인 및 직원 14명, 대우건설 법인 및 직원 1명을 지난 10일 불구속 기소의견으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 결과 제공을 시도한 금액이 혼재돼 있어 정확한 총 제공 금액은 파악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이들 건설사와 계약을 맺고 전면에 나서 이같은 범행을 함께한 홍보대행업체 9곳 직원 총 293명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겨졌다.

또 현대건설의 돈을 받은 조합 총회 대행업체 대표 등 10명, 롯데건설의 돈을 받은 조합원 9명도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겨졌다.

이들은 모두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위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올해 이들 건설사에 대해 압수수색을 차례로 진행해 증거를 확보했다. 대우건설은 올해 1월, 현대건설은 4월, 롯데건설은 8월 달에 각각 진행했다.

◇신발장에 선물 슬쩍…각종 수법 활용

경찰 조사결과 현대건설은 총 28억 원 상당을 조합원 매수 목적으로 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엔 조합원들에게 제공하려다 실패한 금액도 포함돼 있다.

현대건설이 결국 시공사로 선정된 서울 반포주공1단지(1·2·4주구)는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 사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총사업비 10조원 규모의 부지다.

사례별로 보면, 현대건설은 지난해 9월 이 지역 재건축 시공사 선정 총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현금·명품가방 등 1억1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했다.

현대건설의 한 부장은 조합 총회 대행업체가 조합원 접촉이 용이하다는 점을 이용, 은밀히 현대건설을 홍보해 주는 대가로 대행업체 대표에게 5억5000만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원래 조합 총회 대행업체는 홍보감시단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롯데건설은 총 12억원 상당을 조합원 매수에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건설은 지난해 9월 신반포 15차 재건축 시공사 선정 총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현금·고급호텔 숙박·태블릿PC 등 2억원 상당의 금품·향응을 제공했다.

특히 롯데건설은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의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수법을 활용했다. 자사 계열사 특급호텔에서 좌담회를 개최한 후 조합원들을 자연스럽게 숙박시키거나, 태블릿PC 안에 제안서가 있다며 건넨 뒤 돌려받지 않는 등의 수법도 사용한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드러났다.

대우건설도 신반포 15차 재건축 지역을 두고 롯데건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에게 2억3000만원 상당의 금품을 제공하거나 제공 의사를 표시했다.

대우건설의 경우 조합원 신발장에 선물을 두고 오거나, 경비실에 맡기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우건설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지난해 9월 신반포 15차 재건축 사업 시공사로 선정됐다.

◇건설사 직원들, 홍보대행업체 금품 수수하기도

건설사 직원들은 홍보대행업체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을 이용해 이들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기도 했다.

현대건설 직원 2명은 홍보대행업체 두 곳을 통해 총 1억 원의 현금을 수수했다.

롯데건설 직원 9명은 홍보대행업체로부터 법인카드를 받아 골프장·유흥주점 등에서 총 3억 원 가량을 사용했다.

이들에게는 배임수증재 혐의도 추가됐다.

배임수증재죄는 남의 일을 해 주는 사람이 자신의 직무와 관련해 부정한 청탁을 받고 금전 등의 이익을 얻거나, 남의 일을 해주는 사람에게 직무와 관련해 부정한 청탁과 함께 금전 등의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건설사 직원들은 여전히 모르쇠 일관

경찰에 따르면 이들 건설사 직원 대부분은 홍보대행업체에 용역 대금을 지급했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금품·향응 제공은 홍보대행업체의 전적인 책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찰은 수사를 통해 홍보대행업체 직원들이 건설사 명함까지 가지고 다니며 조합원들을 수시로 개별 접촉한 정황을 포착했다. 이같은 조합원 개별 접촉은 서울시 고시 등에 따라 금지된 행위다.

또 건설사들은 일명 '기획방'이라는 공간에 직원들을 상주시켜 놓고 홍보대행업체 직원들과 매일 회의를 진행해 당일 홍보 결과 등을 보고받고 지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확보한 조직도를 보면 조직이 촘촘하고 위계가 갖춰져 있다"면서 "건설사에서 홍보대행업체를 관리했다는 증거들"이라고 말했다.

◇금품 수수 조합원 총 1500여명 넘어

경찰은 금품을 받은 조합원의 경우 총 9명에 대해서만 입건 조치했다고 밝혔다.

현대건설의 돈을 받은 조합원은 1400여명, 롯데건설의 돈을 받은 조합원은 100여명, 대우건설의 돈을 받은 조합원은 150여명에 달해 모두 입건할 경우 무리한 조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경찰은 건설사와 홍보대행업체들이 금품 제공 타깃으로 삼은 조합원은 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고령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한 고령 조합원은 롯데건설과 대우건설로부터 각각 2000만원, 400만원을 받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행위 자체는 불법이 맞지만 조합원의 절반 가까이 입건하는 건 과잉일 수 있고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조합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차원에서 최소한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입건된 조합원 9명은 수차례 현금을 받아온 사람들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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