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34)
삼 불 망(三不忘) - (34)
  • 김정아 기자
  • 입력 2018-12-17 15:29
  • 승인 2018.12.17 15:43
  • 호수 1285
  • 60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옆에 있던 해월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감, 무슨 꿈을 꾸셨어요?”

“허허, 깜빡 잠이 들었나 보구려. 꿈속에 서희 대감이 나타나서…….”

“서희 대감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고려의 존망이 달린 입성책동을 꼭 저지하라는 말씀이 있었다네.”

마침내 해월이가 지필묵을 준비해주자, 이제현은 붓 끝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상소문을 써내려갔다. 장원급제한 문장이 아니던가. 그 붓 끝에 막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하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이제현은 이백(李白)과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할 정도의 문사와 필치로 고려 문인의 기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황제 폐하께.

고려 임금들은 이제까지 상국 황제에게 예의를 다했으며, 상국을 위해 충절을 다 바쳤나이다. 요나라(거란족)가 침략했을 때, 충렬왕이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고 요나라군도 무찔렀사옵니다. 또 상국이 왜국을 칠 때도 고려군은 앞장섰사옵니다. 때문에 상국은 공주들을 고려로 시집 보내 친척나라로 삼았습니다. 게다가 세조황제께서 에릭부케와 왕위 쟁탈을 할 때 마침 고려의 태자(원종)가 6,000여 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고려가 국속(國俗)을 고치지 말고 예전처럼 관리하라’고 하신 유훈을 상기해 보셔야 하옵니다.

이제 듣건대, 상국 조정에서는 고려를 없애고 고려에 행성(行省)을 설립하여 원나라 성(省)들과 같이 하려고 의논한다고 하옵니다. 그렇게 만드는 것은 대국의 풍도가 아닐뿐더러 스스로 세조황제의 유훈을 어기는 것이 되옵니다.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무릇 천하의 국가를 다스림에는 아홉 가지 경도(九經구경)가 있지만, 그 행하는 바는 한가지이니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패망한 나라를 일으켜주며, 어지러우면 바로잡고, 위태한 것을 버티게 하며, 떠나는 자는 후하게 대접하고, 달라붙는 자는 엄히 대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연전 11월에 새로 내린 조서의 조목(條目)을 읽어 보니,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려서 중통(中統, 세조의 연호)·지원(至元, 세조의 연호)의 정치를 회복한다’ 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이 덕음(德音)을 발표한 것은 실로 천하사해(天下四海)의 복이옵니다. 유독 고려의 일에 대해서만 세조황제의 조서를 본받지 않는 것이 옳겠사옵니까. 이제 까닭 없이 조그만 나라의 400년 왕업(王業)을 하루아침에 폐절(廢絶)하게 하여 제사마저 끊어지게 하는 것은 마땅한 처사가 아니라고 사료되옵니다.

다시 생각하건대, 고려는 땅이 사방 천 리를 넘지 못합니다. 게다가 산림과 내와 큰 늪같은 쓸모없는 땅이 10분의 7입니다. 그 땅에서 세를 받더라도 조운의 비용도 되지 않으며 녹봉도 지출하지 못할 것이니, 조정의 세계(歲計)에서 본다면 구우일모(九牛一毛) 일 뿐이옵니다. 더욱이 땅은 멀고 언어가 상국과 같지 않아서 숭상하는 것이 원나라와 아주 다르옵니다. 아마 이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집집마다 찾아가 효유(曉喩, 깨달아 알도록 타이름)하여 안정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옵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왜국의 백성들이 듣는다면, 스스로 전일 상국에 반항한 것이 잘된 계책이라고 하지 않겠사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세조황제께서 고려의 공(功)을 잊지 않으신 뜻을 좇아서, 나라를 나라대로, 사람을 사람대로 두어 그 정치와 부세(賦稅)를 닦게 하고, 번리(藩籬, 울타리)로 삼아서 우리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받들게 하소서. 그리하면 어찌 삼한의 백성들이 집집마다 서로 경하하고 황제 폐하의 덕을 노래하고 읊을 뿐이겠사옵니까? 종묘와 사직의 영령도 장차 저 세상에서 감읍할 것이옵니다.

 

이제현은 마치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나 악비(岳飛, 남송의 명장)의 만강홍(滿江紅, 금나라 침략에 대한 투쟁의지를 고취한 글)같이 구국의 일념에 불타는 상소문을 써 내려갔다.

너무 혼신의 힘을 다한 까닭이었을까. 이제현은 상소문을 쓰고 난 후 2, 3일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밥도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전신이 나른해지는 피곤이 엄습해 왔다. 온몸으로 울면서 쓴 까닭이었다. 원나라 조정의 비답(批答)이 떨어질 때까지는 그야말로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였다.

원나라 대신들,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 주장에 동조하다

1325년(충숙왕12) 정월 경신일.

좌불안석의 나날이 지나고 운명의 날은 밝아왔다.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이제현은 얼음보다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하고, 먼동이 트기 전에 만권당의 사당으로 가서 향을 살랐다. 그는 재배(再拜)를 마치고 고려 선대왕의 위패를 바라보며 빌었다.

태조 왕건 대왕님, 불민한 소신이 백성된 도리, 국녹을 먹는 신하된 노릇을 다하고자 합니다. 원수 마귀와 같은 간신배들은 태조께서 세운 고려를 넘어뜨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술책을 부리고 있사옵니다. 불화살의 위협으로부터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시고,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멸하지 못하게 부디 굽어 보살펴 주시옵소서.

이제현은 이렇게 기원하고 사당을 나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이제 남은 것은 천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원나라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이제현의 충성심은 천지를 감동시켰고, 천지를 감동시킨 의기는 마침내 원나라 중서도당(中書都堂) 관리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원나라 조정은 이제현의 당당하고 힘찬 문장의 빼어남에 놀랐고, 역사적인 증거와 이치에 맞는 내용에 감탄했다. 원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한마음이 되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마침내 원나라의 승상 배주(拜住), 전 통사사인 왕관, 집현전대학사상의중서성사 왕약(王約), 참의중서성사 회회(回回) 등이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 주장에 동조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이로써 원의 입성책동은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고려 조정이 어찌하지 못한 일을 이제현이 혼자 붓을 들어 해결한 것이다.

중국의 진(晋)나라 명필 왕희지는 “종이는 진(陣)이요, 붓은 칼과 방패며, 먹은 병사의 갑옷이요, 벼루는 성지(城池)이다”라고 역설했다.

이제현이 붓 한 자루를 ‘칼과 방패’ 삼아 입성책동을 분쇄한 것이야말로 한반도가 오늘의 중국이 되는 것을 막아낸 민족사의 쾌거(快擧)였다.

이것은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대 사건’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기도 하지만 영웅이 시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현은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명제로 보여준 것이다.

21세기 초엽인 지금, 우리는 아직도 700년 전처럼 초강대국의 이해에 여러 가지로 얽매인 처지다. 초강대국들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때, 이제현처럼 그 한복판에 뛰어들어 우리의 입장을 떳떳이 지킬 수 있는 인재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며칠 후. 이제현은 입성책동 분쇄의 마무리를 위해 충선왕에게 고했다.

“고려에 사람을 보내 입성책동이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는 것을 고릉(高陵)과 경릉(慶陵)에 고하는 제사를 거행하게 하시옵소서. 이는 고려 사직이 끊길 뻔한 위기를 열성조(列聖朝)에 고하기 위함이옵니다.”

“암,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고말고.”

이것으로 입성책동을 무산시킨 후 일련의 조치들이 마무리되었다. 그 후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이제현은 고뿔 몸살 증세로 며칠을 누워서 지냈다. 온 몸에 신열이 내려 사지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얼굴은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해월이는 몇날 며칠 침식을 잊고 정인의 병 쾌차를 위해 간호를 했다. 해월이의 정성스런 돌봄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이제현은 며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은 가까스로 회복되었지만, 이제현은 잠깐의 만족 뒤에 찾아오는 긴 허무와 두려움에 다시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불교의 《법구경(法句經)》을 읽고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음미했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을 들어 어두움 속을 밝게 비추듯 지혜의 등불을 항상 밝히어 번뇌에 덮임을 없게 하여라.

진정 아는 사람은 떠들지 않고, 떠드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지자불언 언자부지).

어느 날. 이제현은 만권당의 정원을 산책하다가 문득 고려의 역사를 상고하게 되었다. 25세의 나이에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쓴 이규보(李奎報)와 2차 입성책동을 저지한 자신을 비교해 보았다.

‘이의민이 10년째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 왕이 있으나 허울뿐이고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울 때 이규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옛 영웅 주몽의 생애를 통해 후손들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로부터 80년 뒤, 이규보의 영향을 받은 일연(一然) 스님은 민족사의 자랑으로 여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쓰게 되었다.

젊은 시인의 시 한 편이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자리 매김하고 웅변했듯이, 내가 한 입성책동 저지도 국난을 막고 사직을 지킨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을까…….’

이처럼 골똘히 사색에 잠긴 이제현의 곁에 해월이가 소리 없이 다가와 나지막하게 이야기 했다.

“무엇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입성책동 이후가 걱정이 되어서….”

“부원배들의 매국적인 입성책동은 중단되었지만, 향후 원나라의 간섭은 형태만 달리할 뿐이지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될 것이 분명해요.”

이제현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주문하는 해월이의 우국충정이 대견하기도 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해월이의 말이 백번 지당하네. 역신(逆臣)들의 입성책동은 실패했지만, 역신들의 또 다른 매국행위는 ‘원간섭기’가 이어지는 한 독버섯처럼 돋아 날 것일세.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부닥칠수록 조정에서는 일심협력하여 유비무환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데, 신료들의 생각이 하나같지 않으니 그것이 걱정이네…….”

“조정이 어려울수록 선생님의 경륜과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요.”

두 사람은 밝은 눈으로 서로의 우국충정을 확인하곤 흐뭇해 하였다.
 

충혜왕의 폐정을 간하고 낙향하다
 

1323년(충숙왕10) 8월 계해일.

원나라 영종(英宗)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였다. 어사대부 테시(鐵失)가 암살을 계획하여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다윤현<多倫縣> 서북)에서 대도(大都, 연경, 지금의 북경시)로 이동하던 영종을 남파점(南坡店)에서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충선왕의 처남인 이순 테무르를 황제로 추대하였는데, 이순 테무르의 시호가 태정제(泰定帝)이다.


(다음 호에 계속)

 

김정아 기자 jakk3645@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