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태정제는 충선왕에게 다시 고려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충선왕은 굳이 이를 사양하고 연경의 만권당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월조는 남쪽 가지에 집을 짓고(越鳥巢南枝 월조소남지), 호마는 북풍에 운다(胡馬嘶北風 호마시북풍)’는 말이 있으니, 충선왕인들 어찌 고국이 그립지 아니하였겠는가. 다만 권력의 무상(無常)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1325년(충숙왕12) 5월 23일. 유배생활의 후유증이 깊어서 일까. 충선왕은 연경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만권당 저택에서 붕어(崩御)했다. 향년 51세였다. 이제현은 이때 고려에서 충선왕의 붕어 소식을 접하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신단 말인가. 한참 수를 누릴 수 있는 연치(年齒)이신데. 선왕께서 만리타국에서 그토록 고초를 당하신 게 천붕(天崩)의 원인이었어.’

충선왕은 이제현에게는 지존(至尊)을 떠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천붕지통(天崩之痛)이란 말을 실감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외로움을 목 놓아 울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에 대한 사평(史評)을 이렇게 썼다.

충선왕은 왕위에 있은 지 5년이요, 향년 51세였다. 왕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였으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무엇이든지 한번 듣고 본 것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 매양 선비들을 모아 놓고 옛날 국가들의 흥망성쇠와 임금과 신하들의 잘잘못을 연구하기를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더욱이 송나라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기 좋아하여 일찍이 신하들에게 동도사략(東都事略)을 낭독시키면서 듣고 있다가 범중엄, 구양수, 사마광 등의 명신전을 들을 적에는 반드시 이마에 손을 얹고 경모하는 뜻을 표시하였으며, 정위, 채경, 장돈 등의 간신전을 들을 적에는 이를 갈면서 분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충선왕의 붕어를 계기로 고려에서는 마침내 권력 교체가 이루어졌다. 권력교체기에는 자칭 타칭 ‘공신’들이 많이 등장한다. 공신들은 한정된 떡을 나누는 권력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들의 정파적 이익에 함몰되어 버린다. 그들은 오류에 빠져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데,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과 자기 과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정권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기보다는 지난 정권의 업적을 폄훼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내기 일쑤이다.

‘원간섭기’의 고려의 국왕들은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 불행한 군주들이었다.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원나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영명한 군주가 연속해서 나오지 않아 국운을 바로 잡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따라서 어리석은 국왕은 능력 위주의 탕평인사보다는 측근 위주의 족벌인사를 펼치는 것이 다반사였다. 측근정치는 필연적으로 인의 장막을 강화시켜 밀실정치가 강화되었다. 아첨꾼들이 활개를 치는 붕당정치를 초래하여 권력남용의 폐해를 심화시키고 말았다.

충숙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선왕이 타계하자 충숙왕의 측근들은 이구동성으로 ‘과거 청산’을 외쳤다.

먼저 찬성사 전영보(全英甫)가 말했다.

“전하께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상왕(충선왕)의 눈치를 살피며 소신 있는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사옵니다.”

이어서 평리(評理, 참지정사의 후신, 종2품) 윤석(尹碩)이 거들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이제 진정 전하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니 상왕의 정치를 청산해야 하옵니다.”

지밀직사사 이능간(李凌幹)이 이에 질세라 가세했다.

“상왕의 정치를 청산하고 새롭게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친정(親政)을 펼쳐야 하옵니다.”

이 같은 측근 공신들의 ‘과거 청산’ 주장으로 충숙왕은 즉위한 지 실로 12년 만에 친정(親政)을 폈다. 그러나 이는 정치개혁의 성과보다는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39세의 나이에 종2품의 정당문학에 임명되다

1325년(충숙왕12) 11월.

39세의 이제현은 추성양절(推誠亮節)이라는 공신호(功臣號)를 하사받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종2품)를 거쳐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으로서 국정을 논의하는 종2품의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차했다. 불혹의 나이에 고려 조정의 중역으로 우뚝 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현은 충선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세칭 ‘과거 정권’의 인물이었다. 당연히 이제현의 정치적 입지는 그리 넓지 못했다. 친정 정치에 몰입해 있는 조정의 과거 청산 분위기 속에서 이제현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가 요원하였다.

충숙왕은 1326년(충숙왕13) 7월에 교서를 내렸다.

‘역적의 무리들이 나라를 뒤집어엎기 위하여 입성책동을 청원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일심 협력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입성 문제를 파탄시켜 다시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니 그 공이 있는 자들을 1등 공신으로 봉한다.’

그는 이듬해인 1327년(충숙왕14) 11월에도 교서를 내렸다.

‘과인이 원나라 연경에 체류한 지 5년간 간신들이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려고 음모할 때에 시종하던 신하들이 시종일관 절개를 지켜 과인을 도왔으니 그 공이 있는 자들을 각각 1등 공신과 2등 공신에 봉한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공신 목록 어디에도 이제현의 이름은 없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겼다’는 푸념이 나올 만한 상황이었다. 간신들의 입성책동을 붓 한 자루로 분쇄한 이제현이었다. 그런 구국의 영웅이 충선왕 측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두 번에 걸친 논공행상에서 뒷전으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충숙왕은 이제현을 토사구팽(兎死狗烹)시킨 것이다. 고금(古今)의 권력교체에 따른 염량세태(炎凉世態)와 영고성쇠(榮枯盛衰)를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었던 이제현이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이제현은 충숙왕의 신의 없는 처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흐른 1330년(충숙왕17) 2월.

충숙왕은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양위(讓位)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그의 장남인 16살의 왕정(王禎)이 고려 제 28대 왕에 올랐다. 그가 바로 충혜왕(忠惠王)으로 몽골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고 모친은 명덕태후 홍씨였다. 이때 충혜왕의 동복 동생인 왕기(王祺, 뒤의 공민왕)는 강보(襁褓)에 싸인 한 살이었다.

고려의 충숙, 충혜왕대는 부자가 중조(重祚, 물러난 임금이 다시 임금 자리에 나감)하는 등 정치적 음모와 군사적 대결로 얼룩진 혼란기였다. 충혜왕은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한 덕성과 철학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 패륜을 일삼았다. 그는 폐신(嬖臣, 임금이 편애하는 신하) 배전(裵佺)과 주주(朱柱) 등에게 국가의 주요 정무를 일임하고 향락과 여색에 빠져 지냈다. 성격마저 포악하여 즉위 후 6일 동안이나 정사를 폐하고 사냥을 즐겼다. 날마다 내시들과 상하의 예절이 없이 씨름을 하며 질펀하게 놀았다. 새로 등극한 왕의 행실이 그 꼴이고 보니 국정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충간을 잘하는 기거주(起居注, 임금의 일정 기록관, 종5품의 간관) 이담(李湛)이 국가의 장래를 크게 걱정하여 충혜왕에게 간언을 올렸다.

“임금은 행동을 근신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임금의 일동일정(一動一靜, 모든 동작)을 전하의 측근자들이 기록하기 때문이옵니다.”

“누가 그런 것을 기록하는가?”

“그것은 사관(史官)의 고유 직책이옵니다.”

“과인의 과실을 기록하는 자는 모두 서생들이로구나.”

충혜왕은 본래 유생들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았는데, 이담의 충간을 받고 나서부터 더욱 유생들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패악의 강도가 심해졌다.

충혜왕은 고려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원나라에 들어가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장녀 덕녕공주(德寧公主)와 혼례를 올렸다.

충혜왕에게 간언하고 최해와 동반 사직하다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게 된다.

이제현은 충숙왕이 친정을 펼친 5년 동안 조정의 실세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다. 불혹(不惑)이 안 되는 젊은 나이에 관료들이 소망하는 재신의 자리에 올랐지만 국정의 중심에서는 언제나 비켜 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충혜왕이 왕위에 올라 부왕(父王) 이상으로 폐정을 밥먹듯이 저지르자 이제현은 한없이 번민할 수밖에 없었다.

1330년(충숙왕17) 3월 그믐날.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던 이제현은 어려울 때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 주던 최해에게 기별하여 만수산(萬壽山, 송악산의 다른 이름)의 나지막한 등성에 위치한 왕건 왕릉에서 만났다. 그날따라 바람은 잔잔하고 새 울음소리마저 그쳐 사위는 적막강산처럼 고요했다. 두 사람은 왕건대왕의 초상과 후삼국을 통일한 8인의 개국공신상 앞에 향을 사르고 그 넋을 기렸다. 두 사람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하산하여 십자가의 단골 술청으로 향했다. 이윽고 술자리를 벌인 두 사람은 잔을 기울이며 자신들의 출처진퇴(出處進退)를 상의했다.

먼저 이제현이 말을 꺼냈다.

“졸옹, 공자는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 있을 때는 녹을 먹되, 나라에 정도가 서 있지 않은데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가르쳤지.”

“익재, 황석공(黃石公)은 《소서(素書)》에서 ‘나라가 장차 패권을 차지하려면 인재들이 모여들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현자들이 먼저 회피한다(國將覇者 士皆歸 국장패자 사개귀, 邦將亡者 賢先避 방장망자 현선피)’고 경고했네.”

“졸옹,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니던가. 고려 조정은 여우를 피하려다 사자를 만난 꼴처럼 위태롭기 그지없게 됐네.”

최해가 이에 맞장구를 쳤다.

“익재, 잘 보았네. 충신들이 배척당하여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나올 수 없는 조정은 조정이라 할 수 없네.”

“졸옹, 이런 조정에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익재, 사실 나도 그동안 사직 여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네. 그래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갈 생각이네. 시골로 내려가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글이나 쓰고 싶네.”

이를 두고 이심전심이라고 하는가. 밤이 이슥해질 무렵, 이제현과 최해는 생각하는 바를 함께 행동으로 옮길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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