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세익스피어는 말했다. 죽음 앞에서 겁쟁이는 몇 번이고 죽지만, 용기 있는 자는 한 번 죽을 뿐이다. 산 사람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음 앞에 초연할 사람은 없다. 요즘 잘나가는 칼럼니스트인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죽음과 함께 진정한 평가의 시간이 찾아온다고 했다. 결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삶은 의미 있다. 생의 마지막은 대개 슬프고 두렵지만, 욕된 순간마저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오직 전쟁터에 선 전사들만이 죽음을 간구한다. 적들에게 죽음을! 대통령 지지도가 취임 이후 처음으로 부정 평가가 긍정평가보다 높아진 사실이 때아닌‘데드(Dead)크로스’ 논란으로 번졌다. 이 용어가 주식시장에서 사용되는 ‘데쓰(Death)크로스’를 차용한 콩글리쉬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한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따로 설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언론마다 헤드라인으로 뽑을 정도로 반대자들을 묶어주는 힘을 발휘했다.

이전에는 여론조사 분석에서 단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던 ‘데드크로스’라는 용어는 앞으로 ‘밴드웨건 효과’나 ‘언더독’과 같은 용어처럼 흔하게 쓰일 것이다. 야당으로서는 생소한 이 용어 하나로 정부여당에게 타격을 주고 지지층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효과를 거뒀다. 여론조사 수치가 들쑥날쑥하고 오차범위가 있어 ‘크로스’여부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간단히 무시당했다.

대통령제 하에서 대통령 지지도 여론조사 곡선은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한다. 보통은 완만한 경사를 그리지만 피사의 사탑에서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자유낙하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예외는 없다. 임기 시작 즈음에 고점을 찍고 짧은 기간 등락은 있을망정 임기 마지막 시점에는 바닥을 맴돈다. 단임제 대통령에게는 더 야박하다. 문 대통령이라고 예외가 되기는 어렵다. 문 대통령은 이제 박근혜라는 비교대상을 벗어나 홀로 유권자 앞에 섰을 뿐이다.

애초에 80%가 육박하는 지지율 자체가 착시현상에 불과했다. 폐차 직전의 타이탄 트럭을 몰던 사람에겐 소나타도 순간 페라리처럼 여겨질 수 있다.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을 저질렀던 탄핵 대통령을 이어 달리는 촛불 대통령이 70~80%의 지지율을 상당 기간 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016년 겨울 촛불의 후광효과라고 봐야 한다. 그 기간이 1년 반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이 어느 한쪽엔 기적이고 다른 한쪽엔 악몽이었을 뿐이다.

여론조사로 드러나는 정치적 지지의 크기는 권력운용을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지지도 40%일 때 못한 일을 80%일 때는 할 수 있다. 그 역도 성립한다. 문재인 정부는 고공비행하는 지지율을 정책 수행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데 서툴렀다. 북핵문제, 남북관계 개선에 전력투구하느라 한눈팔기 어려웠을 수는 있다. 여소야대로 사사건건 국회에서 발목 잡히기도 했다. 어쨌건 국민들 눈에 남북문제 말고 뚜렷한 성취가 안 보이는 답답한 상황이다.

차츰 무능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고 있는 이런 현실을 타파해야 대통령지지도가 50%대를 회복할 길이 열린다. 문대통령은 지난 1년 반 동안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면서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도보다리를 걸으면서 화해를 연출하고 백두산에 올라 두 손을 맞잡아 치켜 올릴 때 현 집권세력은 어느 기업집단, 정치세력보다 세련되고 유능하게 비춰졌다. 국민들이 판문점 선언의 의미를 곱씹어 대북정책에 지지를 보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데드크로스 포인트’ 밑을 헤매는 지지를 얻고 있는 야당을 상대로 유능해지는 것이 어렵다는 변명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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