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330년(충숙왕17) 4월 어느 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으나, 이제현의 마음속은 겨울날의 시린 혹독함으로 어지러웠다. 이제현은 마침내 입궁(入宮)하였다. 충혜왕은 이 날도 후궁들을 좌우에 끼고 않아, 아침부터 풍악을 울리며 주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중신이 들어와도 궁녀들과 희롱만 계속할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현은 침통한 표정으로 술상 앞에 꿇어앉아 충혜왕에게 간언을 올렸다. 22년 전 감찰규정 우탁이 충선왕에게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 그 심정으로.
신, 이제현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사치는 천화(天禍)의 근원이 되고, 음란은 만재(萬災)의 근본이 된다’고 하옵니다. 옛글에도 ‘간사한 말과 눈을 어지럽게 하는 계집은 총명을 흐리게 한다(姦聲亂色 不留聰明 간성난색 불류총명)’는 말이 있사옵니다. 자고로 간신이 조정에서 활개를 치면 국정이 어지러워지는 법이요, 임금이 계집에게 미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는 법이옵니다.  
그 옛날 하나라 걸왕(桀王)이 말희(末喜)에게, 은나라 주왕(紂王)이 달기(己)에게, 주나라 유왕(幽王)은 포사(褒似)에게 빠져 나라를 망친 사례를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신 지 몇 달째 여색만 탐닉하고 계시니, 간신들은 국정을 농단하고 있으며 국정은 날이 갈수록 어지러워지고 있사옵니다. 이러고도 종사가 무사할 리 없사옵니다.
임금을 불의(不義)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신하에게 죄악이 되기 때문에 소신은 오로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같은 고언(苦言)을 올리는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여색과 간신들을 멀리 하시고, 국사에 전념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충혜왕은 피를 토하는 듯한 이제현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당문학 이제현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후부터는 조정 대신 누구도 간언을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이제현은 붓을 들어 담담하게 사직의 변을 써내려갔다. 최해도 정3품의 성균관대사성직을 동반 사직했다. 
소신은 지금까지 봉직해 온 공복의 생활을 마감하려 하옵니다. 그동안 능력에 걸맞지 않게 과분한 녹을 받아 왔지만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하옵니다. 이제 다시 민초로 돌아가서 부족한 학문을 연마하고자 하니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사직의 변을 쓰고 난 이제현은 그동안 가슴속을 무겁게 짓눌러 왔던 응어리 같은 거북함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의 기초가 된 그 옛날 악의(樂毅)가 연나라 혜왕(惠王)에게 올린 글귀가 불현듯 떠올랐다.
‘군자는 붕우(朋友)와 절교를 하더라도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으며(君子交絶 不出惡聲 군자교절 불출악성), 충신은 고국을 떠나더라도 허물을 군주에게 돌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忠臣去國 不潔其名 충신거국 불결기명).’
이제현은 나라에 정도(正道)가 서있지 않은데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구차하게 허물을 군주에게 돌려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이제현은 정치중단을 선언한 후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정계에 복귀할 때까지 무려 6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재야에 머무른다. 그의 나이 44세부터 50세까지다.
충선왕과 함께했던 이제현 득의의 시절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끝나고 말았다. 시대는 인걸을 소명하지만, 소명 받은 사람의 소임이 끝나면 역사의 뒤안 길로 물러나야 한다. 역사를 주관하는 신은 이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제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젊은 날의 포부와 중년의 경륜을 한창 펼칠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에 그는 혼돈과 암흑의 세상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결코 후회가 남지 않았다.
그해(1330년). 이제현의 둘째 아들 달존(達尊)이 과거에 급제하고, 손자 덕림(德林)이 태어났다. 이제현은 총명하고 귀한 운세를 타고난 경주이씨 19세손에게 ‘덕으로 숲을 이루라’는 의미로 ‘덕림’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세월은 빨라 옹알이를 하던 손자 덕림이 첫돌이 지나 걸음마를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해맑은 눈망울로 할아버지의 얼굴을 알아보고 어설프게 뭔가를 말하는 손자의 모습에서 이 제현은 삶의 허전함을 달랠 수 있었다. 자신의 분신인 덕림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인간이란 절박해졌을 때 진실한 삶이 찾아오기 마련이던가. 6년간의 재야 생활은 이제현에게 절대 고독이었지만 그는 고독을 이기는 방법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그리하여 이제현은 최해와 함께 뜻 맞는 재야 선비들과 시사(詩社)를 만들어 철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키는 풍류를 즐겼다. 이 시사의 규약은 살구꽃이 피면 처음 모이고, 복숭아꽃이 필 때와 한여름 참외가 익을 때 모이며, 가을 순천관의 원지(園池)에 연꽃이 만개하면 모였다. 또 국화꽃이 피어 있는데 눈이 내릴 때와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이례적이라 하여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약관 34세에 지공거를 역임했던 이제현은 시서예악(詩書禮樂)과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기에 열중했다. 그 결과 경향 각지에서 이제현의 문하에 들기 위해 선비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 

이제현과 최해, 박충좌의 구명에 앞장서다

1332년(충숙왕 복위1) 2월.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소환되자 충숙왕이 다시 복위하였다. 
이제현이 사직 상소를 쓰고 재야생활을 시작한 지 2년이 넘어서 이제는 삶의 허전함으로부터 몸과 마음이 제법 자유로울 수 있는 시절이었다. 정원 느티나무 아래 멍석을 깔고 독서를 하고 있던 이제현은 무심히 송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는 소나무의 푸른 잎사귀에서는 늦여름의 무르익은 기운이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에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묻어나오는 무더운 날씨이건만, 이제현은 먼 산을 바라보며 벌써 반 시간 가까이 무언가 골똘하게 상념에 빠져 있었다.
안축이 이제현의 수철동 집을 방문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 가뜩이나 박충좌의 근황이 그리웠는데, 때마침 방문한 안축이 전한 박충좌의 유배 관련 발언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연인즉 이러했다.
전라도 안렴사(按廉使, 각 도의 으뜸 벼슬)로 나간 박충좌는 폐신(嬖臣) 박련이 충혜왕의 편지를 전해오자 아연실색했다. 편지의 내용은 “양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을 용인하여 주라”는 것이었다. 
박충좌는 잘못된 왕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련이 “일개 안렴사가 무례하게도 왕의 편지를 헌 종이와 같이 버렸다” 라며 무고하였다. 이에 대로한 충혜왕은 매를 쳐서 박충좌를 해도(海島)로 유배 보냈다.
이제현의 마음은 금방 거센 태풍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잠시 후, 격정을 참지 못하던 이제현은 가복인 만복을 통해 사자갑사에서 은거하고 있는 최해에게 박충좌의 유배 소식과 아울러 함께 구명운동을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며칠 후, 재야의 두 거두인 이제현과 최해는 박충좌의 구명을 위해 감찰대부(監察大夫, 감찰사의 으뜸 벼슬, 정3품) 송서(宋瑞)의 집을 부리나케 찾아갔다. 충숙왕이 복위하자 충혜왕의 총애를 받은 자는 모두 쫓겨났는데, 안축은 쫓겨난 자와 친한 사람이라고 참소 당하여 판전교지전법사에서 파면 당하였다가 그해 봄에 전법판서(典法判書, 법률, 형옥을 맡아본 관직, 정3품)로 복직되었으나, 다시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된 터이라 동참할 처지가 못 되었다. 송서는 뜻밖의 방문객들의 내방에 내심 당황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이제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박충좌는 천하가 알아주는 청백리이고 천성이 온후하여 불의를 저지를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을 감찰대부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송서는 힘없이 대답했다.
“예, 그러합니다.”
“안렴사가 양민을 노예로 삼으려는 폐신의 발호를 막은 것은 상을 줄 일인데, 상은커녕 벌을 주는 조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조정이란 말이오?”
“…….” 
정의감이 강한 최해는 박련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며 송서를 압박했다.
“박련은 환관의 노예 출신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아 고관대작이 되었지만 자신의 모친 상중에 결혼할 정도로 패륜아요.”
“…….” 
“충숙왕이 복위하여 박련을 포함한 충혜왕의 폐행(嬖幸, 임금에게 아첨하여 총애를 받는 신하)들을 모두 순군옥에 가두었으니, 박련이 참소한 박충좌의 죄도 원인무효가 되었소이다. 그러니 내일이라도 당장 박충좌를 석방하는 것이 올바른 처사가 될 것이오.”
송서는 두 재야 거두의 추상같은 항변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없지만, 박충좌의 구명을 위해 내일 금상께 상주해 보겠소이다.”
진실은 외로워도 반드시 승리하기 마련이다. 고려 조정은 난신들의 적폐로 산을 이룰 정도로 썩어가고 있었지만 박충좌는 결발동문 두 친구의 구명 노력에 힘입어 곧 풀려나왔다. 
이후 박충좌는 감찰지평(監察持平, 사헌부의 5품)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경상도 염세(鹽稅)를 감독하는 예문응교(藝文應敎)에 제수되었으나 ‘간신들과는 함께 정사를 논하지 않겠다’며 부임하지 않았다.

<다음 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