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사랑하는 권씨 부인과의 사별

1333년(충숙왕 복위2) 2월 하순.

이제현이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처사로 지낸 지 3년이 흘렀을 때다. 권씨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의 지극정성 간호도 소용없었다. 이제현은 부인상을 치른 뒤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 누워 있었다.

30년을 함께 살며 사랑한 부인과의 정을 잊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50도 안 되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영혼이 가엾어서일까. 이제현은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며느리들의 수심 어린 수발조차 뒤로하여 몸은 삭정이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그해 3월 하순이 되어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꼬박 한 달을 앓아누웠던 이제현은 온전히 이부자리를 걷어내고 거동을 시작했다.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승석(僧夕, 이른 저녁 때) 무렵이었다. 이제현은 옛 추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부인과 함께 거닐던 정원을 거닐었다. 침침한 하늘과 쓸쓸한 바람이 그를 더욱 외롭게 했다.

‘여보, 대답하시구려. 못난 지아비를 만나 한평생 젖은 손으로 살게 해 미안하오. 당신의 부덕과 내조로 순탄한 벼슬살이를 한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뭘 해 준 게 없어 부끄럽소. 당신이 있어 생이 무료하고 외롭지 않았는데. 당신이 있어 집안이 화목하고 무탈했는데 무정하고 야속한 사람 같으니. 나를 버리고 먼저 가다니! 나더러 혼자 어떻게 살라고…….’

큰아들 서종은 실의에 빠진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눈물겨운 호소를 했다.

“아버님,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몸을 상하시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차라리 시작(詩作)에라도 몰입하신다면 어머님 생각이 덜하지 않겠사옵니까.”

이제현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서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너의 생각을 어찌 모르겠느냐. 그러나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네 어머니와 함께한 지난 30년 세월의 정리(情理)를 지우기 힘들어서가 아니겠느냐…….”

서종은 아버지 이제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아버님이 지금 겪고 계신 고통과 괴로움은 세월이 가져다 주는 망각이라는 약만이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공녀(貢女)들의 슬픔’을 그치게 하다

이야기는 6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갑술년(1274, 원종15) 봄. 고려 조정은 결혼도감(結婚都監)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원나라에 보낼 여자들을 구했다. 오늘날 결혼(結婚)이라는 말은 737년 전부터 부끄러운 역사가 서려 있는 말로, 그 근원은 바로 고려 말의 결혼도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나라는 만자군(蠻子軍, 남송의 귀순병을 중심으로 조직한 군대)의 병사들에게 배우자를 마련해 준다는 위무책으로 관용비단 1,640단의 납폐물(納幣物)을 보내어 남편이 없는 여자 140명을 급히 요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해 가을까지 독신녀와 역적의 처, 노비의 딸, 파계승의 딸 등을 강제로 선발하여 마치 공물처럼 원나라에 바쳤으니 이들이 바로 ‘공녀(貢女)’였다. 공녀로 뽑힌 여자들에게는 치장할 화장값으로 비단 열 두필씩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부녀 공납의 표면적 구실에 불과했다.

1287년(충렬왕13) 12월. 이제현이 태어난 해에 충렬왕은 교지를 내렸다.

‘양갓집의 처녀들은 먼저 관청에 신고한 이후에 출가시킬 것이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307년(충렬왕33)에 충렬왕은 다시 교지를 내렸다.

‘나이 16세 이하 13세 이상의 여자는 마음대로 혼인할 수 없게 하라.’

원나라에 팔려가는 공녀에는 왕족이나 관인(官人)의 딸도 포함되었지만, 주 대상은 일반 백성들의 딸로 ‘동녀(童女)’라고 표현되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앳된 소녀들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의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열세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早婚)의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원나라에서 지속적으로 공녀를 요구한 실질적 이유는 고려 여자에 대한 야욕 충족책과 좀처럼 항복하려 하지 않던 고려인의 부녀를 강탈함으로써 고려의 반몽(反蒙)의지를 무기력하게 하려던 고등 술책이었다.

후일 김찬(金贊)은 공녀로 선발된 어린 소녀들의 심정을 <동녀시(童女詩)〉로 대변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한집이 되니

동쪽 땅에 명령하여 궁녀를 바치라 하네.

규중(閨中)에 거처하여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였더니

관청에서 선발함에 심사하는 많은 눈을 어찌 감당할까.

살짝 다듬은 근심 어린 두 눈썹이 파란데

부끄러워 하는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하니 온통 발개지누나.

어린 꾀꼬리가 깊은 숲 속 나무를 떠나려 하고

젖내 나는 제비가 날아 옛 둥지를 잃으려 하네.

낭원(苑, 신선의 화원, 원나라 궁궐)에 옮겨 심은 꽃은 금방 핀다 하고

광한(廣寒, 달의 궁전, 원나라 궁궐)에 붙여진 계수나무는 편안히 자란다 하지.

떠나가는데 미적대지만 솜털 깔린 수레에 실리고

바쁘게 떠나려 하자마자 준마가 달리누나.

부모의 나라가 멀어지니 혼이 바로 끊어지고

황제의 궁성이 가까워질수록 눈물이 비오듯 하는구나.

공녀제도는 1274년(원종 15년)에 140명이 원나라로 보내진 것을 시초로, 6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어 폐해가 극심했으며, 원나라로 갔던 처녀진공사(處女進貢使)의 왕래 횟수가 50회 이상 되었다.

이제현은 공녀로 뽑힌 딸을 구하려다 갖은 수모를 겪은 홍규(洪奎)의 일화를 잘 알고 있었다. 홍규의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1270년 개경환도를 명한 원종에 반발하여 임유무가 항전태세를 취하자, 송송례 등과 함께 삼별초를 동원해 임유무를 죽인 사람으로 고위관직에 있었다.

그 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양가의 여자를 뽑아서 원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바치려고 했는데, 홍규의 딸도 그중에 뽑혔다. 홍규는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써 보기도 했지만 그의 딸을 빼낼 수 없었다.

이에 홍규는 한사기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내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한사기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대답했다.

“화가 공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홍규는 한사기의 충고를 듣지 않고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 버렸다.

제국대장공주가 이 사건의 전말을 보고받고 크게 노하여 홍규를 가두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것도 모자라 홍규의 딸을 가두어 심문했다.

홍규의 딸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거짓으로 진술했다.

“제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사옵니다.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니 제발 용서해주시옵소서.”

제국대장공주는 쇠로 만든 채찍으로 그녀를 매우 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사신에게 그녀를 선물로 주었다.

제국대장공주 때문에 귀양까지 간 홍규는 그 후 두 딸을 충선왕, 충숙왕에게 시집보냈고, 충숙왕의 비 공원왕후(명덕태후) 홍씨는 충혜왕과 공민왕의 어머니가 되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335년(충숙왕 복위4) 봄. 경기도 포천에 사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원나라에 공녀로 팔려간 딸의 생사를 묻기 위해 이제현을 찾아왔다. 종2품의 정당문학 벼슬을 사직한 재상의 집이었지만, 민초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하는 주인의 덕성 때문인지 하인들은 뜻밖의 손님을 따뜻하게 이제현에게 안내했다.

박씨는 이제현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말했다.

“대감마님, 소생의 미천한 여식이 원나라 황제의 숙위 타리부화(朶里不花)의 첩실로 팔려간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소식이 끊긴 지 오래되었사옵니다. 연경을 오가는 상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진우량(陳友諒)의 군대가 강서성 일대를 점령하자 사위가 황명을 받고 진우량의 토벌을 위해 출정했는데 부하들의 반란으로 그만 목숨을 잃었다 하옵니다. 제 딸의 생사를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제현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박씨를 바라다보며 이야기했다.

“중국의 전란 통에 애꿎은 우리 고려의 딸들이 죄 없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는 풍문을 들어서 알고 있소이다. 내 연경에 기별을 해서 고려댁의 생사를 확인해 볼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고, 고맙습니다. 대감마님.”

당시 지배층 출신의 공녀들은 황제의 후궁, 귀족 내지 고위 관료의 처 혹은 첩이 되어 그런대로 지낼 만 했지만, 대부분 일반 백성 출신의 공녀들은 원에 귀부한 여러 나라 군인의 처, 원나라 황실의 궁녀 혹은 잡역부가 되어 인간 이하의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약소국 고려 소민(小民)들의 분노한 민심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공녀가 원나라로 떠나갈 때 딸을 잃은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으며, 산천초목도 서러워서 울었다. 이를 보는 사람들도 슬퍼서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