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청와대가 새해 벽두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1호 공약’인 광화문 집무실 이전을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말이 보류지 공약 파기의 완곡한 표현이라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지지자 가운데서도 “광장으로 집무실을 옮겨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당초의 취지를 이렇게 헌신짝처럼 버려서야 되겠느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문 대통령의 공약 파기는 처음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 백지화 공약에 따라 대통령 취임 이후 중단했던 신고리 5, 6호기 건설을 재개했다. 지난해 7월 16일에는 수석보좌관회의에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이 사실상 지키기 어려워졌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물론 현실과 꿈은 다를 수 있다. 현실의 한계에 직면했을 때 꿈은 수정되고 미뤄지기도 한다. 자신이 꿈꾸는 바대로 세상을 바꾸는 게 문 대통령의 꿈이었다면 공약 가운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면 된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 당선만을 꿈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나 둘 파기되고 미뤄지는 공약들이 진보 진영 포퓰리즘 정치의 민낯일 수 있다는 얘기다.

- 신고리5·6호기 중단 백지화→최저임금 1만원 무산→광화문 대통령 시대 보류→?
- ‘재정분권’ 공약, ‘복지 포퓰리즘’ 돈줄 전락 우려까지...

 

문 대통령이 2012년 대선 때부터 주창한 ‘광화문 대통령 시대’는 ‘소통’의 가치를 구현하는 핵심 공약이었다. 2017년 5월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문 대통령은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다”며 “선거 과정에서 제가 했던 약속을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했다.

“靑 살아본 분이 어떻게...”
애초부터 현실성 없었나

실제로 청와대는 지난해 10월 ‘광화문 대통령 시대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유홍준 광화문시대 자문위원을 위원장으로 내정까지 했다. 그러나 20개월 뒤 청와대는 사실상 공약을 파기했다. 현 단계에서 집무실을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면 청와대 영빈관·본관·헬기장 등 집무실 이외 주요 기능 대체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광화문 대통령 시대’는 문 대통령의 대선 1호 공약이었지만, 애초에 현실성이 없는 포퓰리즘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현실성 없는 공약으로 국민을 우롱했다”는 야권의 날 선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김병준 한국당 비대위원장은 “정말 몰라서 그런 공약을 했는지, 아니면 그동안 짚어보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나경원 원내대표도 “위선 정부의 또 다른 민낯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의당마저 논평에서 “대통령의 1호 공약이 실현 불가라는 공약(空約) 판정을 받았다. 퇴근길 대통령과 소주 한잔을 상상했던 국민은 공약에 속이 쓰리다”고 했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역시 “청와대에서 살아본 분이 어떻게 저런 공약을 하시나 했다”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 파기 서곡은 이미 지난해부터 연주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7월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파기하고 공식 사과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 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며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10월에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종합권고안에 따라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재개했다.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은 ‘탈원전’을 기치로 내건 문 대통령의 주요 공약 중 하나로, 소득주도성장, 적폐청산과 함께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 간판 공약이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정부가 이미 천명한 대로 탈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며 “더 이상의 신규 원전 건설계획을 전면 중단하고, 에너지 수급 안정성이 확인되는 대로 설계수명을 연장해 가동 중인 월성 1호기의 가동을 중단하겠다”고 새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은 유지될 것임을 강조했다

신고리 5·6호기 중단이라는 대선 공약을 이행하지 못하게 됐음을 확인하면서도 공약의 기본 정신과 정책기조만큼은 확고히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강조한 셈이다. 지지층 단속을 위한 ‘빛 좋은 개살구’ 발언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인기영합주의로 무너진 베네수엘라의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시장경제를 무시하고 선심성 정책만으로 ‘21세기 사회주의’ 모델 국가를 만들겠다는 차베스와 마두로 대통령의 야심은 사실상 실패로 결론 났다”라며 “베네수엘라의 추락은 포퓰리즘의 덫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준다”고 말했다.

지자체 ‘복지 폭주’
책임·권한 구체적 조정 없어

상황이 이쯤 되자 정치권에선 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 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장 문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었던 ‘재정분권’이 지방의 복지 포퓰리즘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 공략은 지자체의 재정자립도를 높이겠다는 취지지만 결과적으로 지자체가 방만하게 재정을 운용할 여지가 있다.

지난달 16일 재정분권 추진 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세 대 지방세 비율을 현행 8 대 2에서 2022년까지 7 대 3으로 조정할 계획이다. 지방세 비율이 늘어난 만큼 지방의 재정 권한도 크게 늘어난다.

당장 정부는 올해부터 세율 조정에 나선다. 대표적으로 지방소비세율(국세인 부가가치세수 중 지방에 배분되는 비율)을 올린다. 현행 지방소비세율이 11%에서 2020년 21%로 늘린다.

우선 내년에 15%로 올린 뒤 2020년엔 현행 11%의 두 배 수준인 21%까지 상향한다는 방침이다. 이에 따라 지방세는 내년엔 3조3000억 원, 2020년 5조1000억 원 늘어난다. 지자체 호주머니로 향후 2년간 총 8조4000억 원의 재원이 추가로 들어가게 된다.

다만 문제는 정부가 지방에 이양되는 책임과 권한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은 채 돈부터 늘리겠다고 나선 점이다. 기능 분담에 대해선 불명확하게 놔둔 채 지방세부터 확대하는 것이다. 지자체의 포퓰리즘을 감시할 만한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지방 살림은 점점 커지는 구조인데 사실상 견제 장치가 없어 ‘방만 재정’이 우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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