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이집트 영공 북한 조종사가 참전해 지켜줬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이집트와 북한은 어떤 계기로 혈맹관계를 맺었나?

▲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됐을 때에 주변국과 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가말 압델나세르가 혁명으로 집권하여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을 때 2차 중동전쟁이 발생했다. 3차는 유명한 1967년 6일 전쟁인데, 이스라엘의 기습으로 이집트 측이 대패했다. 이집트는 3차 중동전쟁에서 시나이반도까지 빼앗겼는데, 참패에 대한 복수로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4차 중동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1973년 이스라엘 유대교의 신년 명절인 욤 키푸르 기간에 이집트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초전 승리를 거두었다. 기습 공격의 주역이 당시 호스니 무바라크 공군사령관이었다. 공군에 의한 기습 공격으로 초기에 승전보를 울렸으나,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종전이 됐다. 그러나 이집트는 4차 중동전쟁을 승리한 전쟁으로 규정하고 매년 승전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초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전쟁 준비를 할 때 낌새를 챈 소련이 전쟁을 우려하여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을 한 사다트 대통령은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3,000명에 달하는 소련 군사 고문단에 72시간 모라토리엄을 주고 추방 명령을 내렸다.

추방으로 인해 생긴 군사적 공백을 김일성 주석이 메워줬다. 이집트 공군의 주 무기인 미그 전투기 부품 제공은 물론 이집트 조종사들이 북한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초기에 전쟁이 났을 때는 모든 이집트 조종사가 기습에 동원이 돼서 공백이 생긴 이집트 영공을 북한의 조종사들이 직접 참전해 지켜줬다. 이집트군으로 위장한 북한 공군 조종사 일부가 전사해 혈맹관계가 된 것이다. 이집트 전쟁 시 결정적으로 도와준 사람이 김일성 주석이다.

-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이집트에 파견됐나?

▲ 그렇다. 초전 승리에 공을 세운 무바라크 이집트 공군사령관은 전쟁 후에 총리가 됐다. 그가 총리 재직 시 사다트 대통령의 사은사로 평양에 방문했을 때 김일성과 무바라크 사이에 맹약이 맺어진 것이다. 

무바라크 총리가 “이집트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도와줘서 보은을 하고 싶은데, 무엇으로 보답을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을 때 김일성이 웃으면서 “우리는 형제국가로 형제를 돕는 건 당연하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단 한 가지만 약속을 지켜 달라. 남북한이 통일되기 전까지는 남한하고 수교를 하지 말아 달라” 하고 부탁을 한 거다. 무바라크와 김일성 사이의 약속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지켜졌다.

-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역량 있는 외교관들이 파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사급 관계 수립이 쉽지는 않았던 큰 이유였나? 그런데 어떻게 총영사급 관계는 맺을 수 있었나?

▲이집트는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기에 북한과는 대사급 관계를, 한국과는 영사급 관계로 처음부터 차등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총영사의 기본 임무는 자국민 보호다.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일이 주 업무고, 부차적으로 정무적인 일을 본다. 물론 실질적인 외교 업무를 보기는 하지만 공식 활동에 제약이 있다. 대사급 관계와 영사급 관계는 정부를 대표하여 협상을 하는 데 차이가 많다.

우리나라는 국력이 북한보다 강해져 활발한 대외 활동을 했지만 공식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외교 활동에 지장이 많았다. 부트로스 갈리는 UN 사무총장이 되기 전에 이집트의 해외 담당 국무상을 역임했다. 갈리 국무상이 방한했을 때 우리와 수교 문제를 대통령에게 직접 건의하여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결국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이집트 수교는 실현되지 못했다. 외교관계를 총영사급 관계에서 대사급 관계로 격상시키는 일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대사는 1995년 4월 이집트와의 수교를 성사시키시면서 그해 5월에 초대 이집트대사가 됐다. 북한과 혈맹관계였던 이집트와의 수교는 흔히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집트와의 수교 성사가 김영삼 정부 시절의 가장 커다란 외교 성과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대사가 전임자들이 이루지 못한 이집트와의 수교를 어떻게 성사시켰나?

▲ 이집트와의 수교는 역대 정부가 계속 달성하려고 했던 외교 목표의 하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부임을 해 사태를 살펴보니 한국과 이집트 관계의 전략적 가치를 통상적인 방법으로 강조하는 수준으로는 외교 목표를 달성할 수 없고, 특단의 접근 방법을 취해야 가능해 보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직접 접근해서 종래까지 품어온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공군 참모총장을 역임했고, 전쟁 시 공헌을 바탕으로 대통령까지 됐기 때문에 그의 관심과 마음을 잡기 위해 당시에 관방장관을 역임한 한·이집트 친선협회 아흐메드 회장과 상의해서 대한한공의 카이로 취항을 성사시켜 대통령의 관심을 유발하도록 했다.

당시 조중건이라는 사람이 대한항공 부회장으로 있었는데, 이 사람이 외교에 관심이 많아 그와 사전에 접촉해 수교를 위해서 카이로 노선을 개설하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 했고, 상업적으로도 이윤 보장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인이 1,000만 명 이상 되는데,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려면 일단은 카이로를 경유해야 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와 연계하는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이익 보장이 되리라는 점을 설득해서 대한항공을 취항시켰다.

이어서 무바라크 대통령과 제일 가까운 인사를 찾기 시작했다. 육군 장군 출신인 오마르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매일 정세 보고를 하는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파견관을 통해 정보부장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를 만나 “우리의 수교 목적이 북한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친구인 한국과도 교류하는 것이 이집트 국익에 더 부합한다”는 논리로 설득하고, 나아가 “지금 북한은 이집트에서 제공받은 소련제 스커드미사일로 자체 미사일을 개발하여 이란을 포함한 중동 지역에 미사일을 역수출하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데 가장 유효한 무기가 미사일이다.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상대하기 위해 미사일이 필요하고, 이스라엘과 대적하는 중동 국가들 중 일부가 북한제 미사일을 구매한다. 

나는 술레이만 정보부장에게 “북한이 이집트에도 판매를 하지만 경쟁국인 이란에도 공급하고 있으니, 이집트의 국익을 저해하고 있으므로 이런 국가를 계속 붙들고 있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한국과 관계를 맺는 것이 이집트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설득했다.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도 보고를 했다. 이는 곧 무바라크 대통령의 대북관에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의 경제 개발 경험이 이집트 경제 발전에 유익하다는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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