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체육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가 터졌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한국체대) 선수가 상습 성폭행 피해를 고발했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뒤 흔들었던 미투 물결이 재점화되는 분위기다. 일반인도 아닌 금메달리스트 국가대표의 성폭행 피해 사실에  국민들도 충격에 빠졌다. 문제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동안 스포츠계는 각종 비리가 넘쳐흘렀지만 조용히 무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터져나온 심석희 선수의 미투가 스포츠계 개혁의 물꼬를 틀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스포츠공정위 등 최근 5년 동안 징계 860건 
복직·재취업 299건


지난 9일 심석희 선수 측 변호인에 따르면 심 선수는 지난달 17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조재범 전 코치에 대한 고소장을 추가로 제출했다. 여기에는 자신이 2014년께부터 조 전 코치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2014년 당시 심 선수는 만 17세로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고소장에는 당시 시작된 성폭행이 지난해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을 한 달 남짓 앞둔 1월 중순까지 계속됐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고소장에 구체적으로 진술된 성폭행만도 10건이다.

심 선수 측은 고소장을 통해 조 전 코치가 초등학교 때부터 절대 복종을 강요했고, 주변에 알리지 못하도록 협박도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심 선수는 변호인을 통해 “지도자가 상하관계에 따른 위력을 이용해 폭행과 협박을 가하고, 약 4년간 상습적인 성폭행을 해온 사건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묵과해서는 안 될 중대한 범죄 행위”라며 “피해 사실이 밝혀질 경우 국가대표 선수로서, 여성 피해자로서 당할 추가적인 피해와 혹시 모를 가해자의 보복이 너무 두려워 모든 일을 혼자 감내했다”고 전했다.

여성 국가대표 선수가 어린 시절부터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하며 성폭력까지 견뎌왔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조 전 코치를 비롯해 스포츠계 문화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추악한 체육계 민낯이 드러났다며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가해자 코치는 ‘갑’ 
피해서 선수는 ‘을’

 

심석희 선수의 폭로 이후 지도자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사례가 더 있으며 가해자들이 연맹에 남아 있다는 폭로가 나왔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지난 10일 체육계·여성계·문화계 시민단체들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조재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진상규명, 재발방지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 “성폭행이 많이 있다고 확인된다. 가해 코치나 임원들은 죄의식이 없이 계속 지도자 생활을 하고 연맹에 남아 있다”고 밝혔다.

피해자가 심 선수 말고도 더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바뀌지 않는 빙상계 내부 실태를 꼬집은 것이다.

여 대표 주장에 따르면 현재 피해자는 심 선수 외에도 5~6명이며 가해 코치는 2명 이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 대표는 “피해자들은 현재까지도 보복이 두려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면서 “신고센터가 있어도 유명무실하다. 빙상연맹만 봐도 그 안에서 모든 걸 쉬쉬하며 덮으려는 게 많다”고 말했다.

여 대표는 이같은 성폭력의   구조적 문제가 한국 스포츠계만의 수직적 관계에서 기인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심석희 같은 경우 권력구조가 한 명에 의해 좌지우지된 게 컸고, 빙상계에 끼치는 권력이 어마어마해서 학부모나 선수들이 맞서 싸우기엔 어려운 구조였다”면서 “소치올림픽 전에도 대표팀 코치 하나가 성 비위 문제로 나갔지만 결국 돌아와서 코치생활을 아직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암묵적 카르텔 속에서 선수들만 희생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한체육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최근 5년여 동안 체육계 관계단체와 스포츠공정위에서 징계를 받은 건수는 860건이다. 이중 징계기간에 복직하거나 재취업한 사례는 24건으로 집계됐다. 징계 뒤 복직하거나 재취업한 사례는 299건이다.

한편 체육계·여성계·문화계 시민단체들은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조재범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처벌·재발방지 대책 마련, 독립·외부기관이 주도하고 민간 전문가가 참여하는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전수조사 실시, 빙상연맹, 대한체육회 등 스포츠계의 고질적인 성폭력 문제를 방관·방조한 기관 책임자들 사퇴, 실효성 없는 감사와 조사, 신고체계 개혁 등을 촉구했다.

조재범 전 코치 [뉴시스]
조재범 전 코치 [뉴시스]

 정용철 교수
“성폭력 일상적으로 벌어져”

 

이런 가운데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스포츠계 성폭력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2010년 연구를 위해 만났던 핸드볼 선수들을 인터뷰한 경험을 말하며 “성폭력이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좀 목격했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예전에는 합숙소가 굉장히 많았다. 훈련하는 트레이닝 장소가 사실은 매우 폐쇄된 공간이기도 하다”라며 “이들이 학교를 다녀도 학교 안에서 섬처럼 고립된 생활을 하고 심지어 남자 코치들은 여자 선수들이 자유롭게 다른 일반 학생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것조차 굉장히 꺼리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적으로 이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오히려, 예를 들어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 등은 상상할 수 없었다”며 “그런 일이 있으면 오히려, 그걸 빌미로 심각한 수준의 폭행과 성폭행이 이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라고 말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정 교수가 선수들 면담 후 논문에 실었던 내용도 소개됐다. 소개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코치들이 술을 마시면서 ‘나는 룸살롱에 안 가. 여자 선수애들이 있잖아’라는 말을 하는 걸 목격한 선수의 목격담, 코치가 ‘귀에다가 혀를 집어 넣었다’라는 내용의 녹취록 등이다.

 

지도자 교육 강화
성폭력 근절 독립기구 설치

 

업계 전문가들은 스포츠계 폭행·성폭행 등의 문제를 막기 위해서라도 코치와 감독들에게 제대로된 재교육이 실시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정근 호서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이전처럼 감독과 코치의 폭행을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가 아니며 심석희 선수가 용기 있게 밝힌 것으로 본다. 지도자 연수를 하더라도 어려운 게, 선수들이 코치가 되면서 좋은 지도자도 많지만 인격적으로 덜 된 지도자들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라며 “지도자 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겸 스포츠공정위원장은 “과거에 체육학 연구원에서 윤리 교육과 성추행 방지교육 등을 실시했는데 효과를 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실시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 코치와 감독도 많아지면 이같은 일이 줄어들 것”이라며 “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엄하게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최고 위원은 지난 9일 심 선수 성폭행과 관련해 “지도자가 업무상 지휘와 위력을 이용해 국가대표를 미성년자 때부터 상습 성폭행한 사건으로 심각하고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지적했다.

남 최고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1차 확대간부회의에서 “이 사건은 업무상 위계·위력에 의한 추행죄에 징역형이 강화되는 등 제도개선 후 첫 번째 사건”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참혹한 피해와 고통을 견디고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그 분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감사하다”면서 “빙상연맹 등 가해 코치의 구타와 성폭행이 반복된 일에 책임지고 이런 범죄가 끔찍한 관행이 아니었는지, 다른 가해자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문체부의 체육계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도 조속히 마무리해서 피해자 심리 치료 법적 지원 방안, 신고 지원 체계 구축 등 성희롱 성폭력 근절을 위한 독립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며 “작년 11월 문체부 성폭력 대책위 2차 권고문, 근절 방안으로 성희롱 성폭력 근절 위한 독립 기구 설치, 교육 및 캠페인 실시를 권고한 바 있다. 문체부는 권고를 신속히 실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남 최고위원은 “미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부는 정의롭게 응답해야 한다”고도 촉구했다. 
김정재 한국당 원내대변인은 “문화, 예술, 체육계를 비롯한 사회 전반의 성폭행 실상을 조사하고 관련 대책 마련에 나설 것”이라며 “관련법을 개정하고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심석희 선수의 용기에 힘을 보탤 것”이라고 밝혔다. 
김 원내대변인은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의 성폭행 피해 폭로로 문화, 예술계에 이어 체육계마저 위계를 앞세운 성폭력의 민낯이 드러났다”라며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감출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심석희 선수의 큰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간 겪었을 아픔에 심심한 위로의 뜻을 표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정부는 부랴부랴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와 전수조사 등의 성폭행 근절 대책을 내놓았다”라며 “대책 발표로 근절될 문제였으면 17세 고등학생이 22살 대학생이 되도록 성폭행이 반복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제가 반복된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라며 “체육계 운영시스템상의 고질적 병폐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이를 드러내야 한다. 심 선수의 용기가 헛되지 않도록 정부는 물론 대한체육회와 체육계 전체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