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공녀문제 해결을 위한 이곡과의 대화

1335년(충숙왕 복위4) 겨울.

이제현의 수철동 사랑방에는 고려인들로 하여금 언제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공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제현, 이곡 두 사제(師弟)가 서안(書案)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이때 이곡은 한 해 전에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직보문각(直寶文閣) 벼슬을 맡고 있었다.

스승인 이제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가정(稼亭), 자네는 명년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간다지?”

“예, 스승님. 2년 후 다시 원나라 조정에 출사하는 조건으로 작년에 귀국했기 때문이옵니다.”

“우리 고려의 딸들이 공녀로 뽑혀 원나라에 팔려간 지가 얼마나 되었지?”

“한 60년은 된 것 같사옵니다.”

“모녀가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니, 아픔이 골수에 사무쳐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된 자가 셀 수 없네. 천하에 이보다 더한 원통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난 세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된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천륜에 반하는 만행이옵니다.”

“가정, 명년에 출국하게 되면 공녀 문제의 심각성을 원나라 인종 황제에게 상소하도록 하게. 그리하여 공녀제도의 폐습이 하루빨리 없어질 수 있도록 해결에 앞장서주게.”

“스승님, 저의 둔필(鈍筆)로 과연 원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뭐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는 법이네. 영웅호걸(英雄豪傑)과 범부(凡夫)의 차이가 그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네. 모든 일에는 기회라는 것이 있네. 기회를 잘 포착하는 사람만이 인걸(人傑)이 되는 법이네.”

“알겠사옵니다, 스승님. 가슴앓이 끝에 병들어 죽은 고려 부모들의 원혼을 달래주고 앞으로 더 이상 불행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이듬해인 1336년(충숙왕 복위5) 봄. 이곡은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는 스승의 당부를 잊지 않고 곧 바로 인종 황제에게 동녀구색(童女求索)을 중지하도록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 폐하.

한 번 채홍사가 오면 나라 안이 온통 소란하여 개·닭까지도 불안해 하옵니다. 아전들이 동녀(童女)를 찾아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는데 감추어 두면 이들 친족들을 잡아다 매질하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사옵니다. 이렇게 한 고을에서 한 번에 데려가는 어린 딸들의 수는 40~50명에 이르옵니다.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별거하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아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딸을 품 안에서 빼앗겨 사천 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부모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사옵니까?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족이 서로 모여 곡(哭)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사옵니다. 공녀를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울부짖다가 비통하고 분하여 더러는 우물에 몸을 던지고 더러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기도 하고,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거나 피눈물을 흘려 실명한 자도 있사옵니다. 아! 우리 고려사람 무슨 죄가 있어 이 괴로움을 언제까지 당해야 한다는 말이옵니까?

 

무릇 나라가 안정된 바탕위에 융성해 나가려면 ‘삼불망(三不忘)’을 지켜야 하는 법. 즉 나라가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말아야 하며(安而不忘危 안이불망위), 나라가 잘 존속해나갈 때 망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存而不忘亡 존이불망망),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 혼란을 잊지 말아야 한다(治而不忘亂 치이불망난).

왜 죄가 없는가? 전환기가 닥쳐왔을 때 그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죄, 밖을 보고 미래를 보고 국운을 융성시켜야 될 시점에 문약과 사치에 흐른 죄, 국난의 시기에 내부파쟁에 빠져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크겠는가? 고려는 선조들이 ‘삼불망’을 망각한 죄에 대한 대가를 이렇게 ‘원간섭기’ 97년간에 걸쳐 두고두고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앞으로 고려의 공녀제도를 없애겠다’는 화답을 했다. 이곡의 이 상소문은 우탁의 지부상소와 이제현의 입성책동을 반대하는 상소와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상소문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20년이 지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 이제현이 1356년(공민왕5)에 반원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고려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다음에야 고려판 정신대인 공녀제도가 폐지되고 고려 여인들은 성적 수난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게 된다.

이제현은 제자 이곡으로부터 ‘공녀제도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원나라 황제로부터 폐지 약속을 받아냈사옵니다’ 라는 서찰을 받고 내심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시절 이제현은 벼슬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어 그 일생 중 가장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이 해에 이제현은 6년 만에 다시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함을 받고 영예문관사가 되었지만, 조정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병마와 싸우고 있는 최해를 문병하다

어느 봄날 아침.

이제현은 바닷물과 시냇물이 마르는 꿈을 꾼 후 뒤숭숭하여 잠에서 문득 깨어났다. 개경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사자갑사(獅子岬寺)에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최해가 병마와 힘들게 싸우고 있는 불길한 꿈이었다.

이제현은 가복인 만복을 불러 지시했다.

“만복아, 내 간밤에 꿈자리가 매우 불길했는데, 얼마간의 양식을 준비해서 졸옹(최해의 호) 대감 댁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예, 행장을 대령하겠사옵니다.”

꿈은 현실과는 반대라는 말이 있지만,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을 삼으며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산 최해는 두번 결혼하여 딸만 셋을 두고 있었지만, 찢어지게 빈한하여 병이 들어도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는 고단한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날 점심 무렵. 아침나절에 집을 나선 이제현과 쌀 두말을 지게에 진 만복은 구슬땀을 흘리며 최해의 시골집에 당도했다. 낮은 지붕의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툇마루 밑에 앉아있던 풍산개가 달려나와 손님을 맞이하며 꼬리를 흔들어댔으며, 외양간에서는 음매- 음매- 하는 소울음소리가 친근하게 들려왔다.

최해가 반갑게 이제현을 사랑방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익재, 이게 얼마만인가? 아침부터 안뜰 감나무 위에서 까치가 별안간 소란스럽게 울더니만 반가운 손님이 오시려고 그랬구먼.”

“졸옹이 얼마나 보고 싶던지 꿈속에 다 나타나서 내 오늘 부랴부랴 행차를 했네.”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는 법 없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더니 쌀독에 쌀이 떨어진걸 어떻게 알았는가? 아무튼 고맙네.”

“이 사람, 별 말씀 다하시네 그려.”

“익재가 어려운 행차를 하였으니 내놓을 것은 없지만 봄술 한잔 따르고 집안의 뜰에서 나는 푸성귀 무침으로 요기를 하세나.”

“그렇게 하세.”

재야의 두 거두는 주안상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병마와 싸우느라 심신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최해는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준 친구의 도타운 정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이제현은 부쩍 야윈 최해를 바라보며 건강을 기원하는 덕담을 건넸다.

“내가 오늘 졸옹 집을 방문하니 마침 동쪽에서 보슬비가 절로 따라서 몰려오고, 훈풍도 함께 실려 오니 머지않아 자네의 건강도 쾌차할 걸세.”

“고마우이, 이사람 익재…….”

이어 손님이라 아랫목에 자리한 이제현은 도연명(陶淵明, 동진의 시인)의 <독산해경(讀山海經)>을 암송하며 은근히 최해의 전원생활을 칭송했다.

孟夏草木長(맹하초목장) 여름의 초목은 나날이 자라고

繞屋樹扶疎(요옥수부소) 집 둘레 나무는 잎이 푸르다.

衆鳥欣有託(중조흔유탁) 새들은 둥지 틀며 즐거워하듯

吾亦愛吾廬(오역애오려) 나 또한 내 오두막집을 사랑하네.

旣耕亦已種(기경역이종) 밭 갈고 씨 뿌리고 난 후에

時還讀我書(시환독아서) 틈틈이 책을 꺼내 읽는다.

이에 최해는 자신의 고독한 생활을 유종원(柳宗元, 당나라의 시인)의 <강설(江雪)>을 읊는 것으로 화답했다.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산이란 산에는 새들이 날기를 멈추었고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길마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졌는데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조각배 위,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혼자서 낚시질, 강에는 눈만 내리고

이윽고 술이 한두 잔 오가며 거나해지자 최해가 이제현이 읊은 도연명의 시를 화제로 삼았다.

“‘밭 갈고 씨 뿌리고 난 후에 틈틈이 책을 꺼내 읽는다’는 도연명의 시 구절은 나의 전원생활을 빗댄 표현 같구먼.”

“남의 귀한 것 탐하지 않고 남이 탐하는 것 탐하지 않으며 오직 강산의 바람과 달을 탐하는 졸옹의 안분지족(安分知足)과 안빈낙도(安貧樂道)가 부러워서 내 <독산해경(讀山海經)>을 한 번 읊어 보았지.”

이제현은 다시 최해가 읊은 유종원의 시에 대한 해석으로 화답했다.

“끝 간 데 없이 텅 비어버린 적적함, 그 속을 꽉 채우며 흐르는 묘함(지혜)의 생명력. 그게 바로 선(禪)에서 말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 진정으로 비어 있음은 묘하게 존재한다)의 자리이네. <강설>에는 존재의 밑바닥 고독의 심연을 찌르는 무궁무진한 선리(禪理)가 넘쳐나고 있네.”

그리고 이제현은 내친 김에 자신이 최근에 쓴 <산중설야(山中雪夜)>라는 칠언절구의 시 한 수를 최해에게 읊어주며 품평(品評)을 부탁했다.

紙皮生寒佛燈暗(지피생한불등암) 종이 이불 썰렁하고 불등 침침한데

沙彌一夜不鳴鍾(사미일야불명종) 어린 중 밤새도록 종을 치지 않네.

應嗔宿客開門早(응진숙객개문조) 자는 손 일찍 문 연다 꾸짖겠지만

要看庵前雪壓松(요간암전설압송) 암자 앞 눈 쌓인 소나무 보려고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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