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준

LG그룹이 구본준 부회장 취임 이후 색다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전사 차원에서 활용하던 ‘영어 공용화 계획’을 폐지한데 이어 남용 전 부회장이 대거 영입했던 외국인 ‘C’ 레벨 임원들과도 결별했다. 게다가 휴대폰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착수할 움직임이다. 놀라운 것은 이 세 가지 방안이 물러난 남 전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했던 일이었다는 점이다. 때문에 남 전 부회장은 실적부진으로 자리에 물러선 후 그와 함께 손발을 맞췄던 직원들의 퇴진으로 또 하나의 멍에를 추가하게 됐다. 내부적으론 남 전 부회장의 그림자 지우기 작업이 착수됐다는 설도 파다하다. 일각에선 구 부회장 체제의 사람이 빈 자리를 메꿀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회사 살리기의 일환으로 설명되고 있다. 따라서 구 부회장도 내년 상반기 실적에 따라서 거취 표명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잘못하면 오너 일가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 전 부회장 그림자 지우기 정황에 대해 알아본다.

3년 반이 넘도록 LG전자를 이끌어 오던 남 전 부회장이 지난 10월 1일 자진 사퇴하고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이 LG전자의 새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임기 중 경영진을 교체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LG전자의 전통에서 벗어난 파격이었고 전격적으로 단행된 조치였다. 그러나 남 전 부회장은 이미 오래 전에 사임을 결심했고 오너와 이사회에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는 후문이다.

새 사령탑에 오른 구 부회장은 쇄신을 요구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경영진을 맞은 LG는 그동안 전문경영인체제를 유지했지만 올해 2분기부터 시작된 경영부실 고리가 끊이질 않았다.

LG전자는 지난 2분기에 영업이익이 1262억 원을 기록해 작년 동기 대비 90%나 급감한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다. 특히 스마트폰 등 고부가가치 제품의 출시가 경쟁사에 비해 늦어지면서 보급형 휴대전화나 LCD TV 등의 가격이 하락한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휴대폰 사업 부진이 핵심

최근 스마트폰 제품을 잇달아 출시하면서 만회를 시도했지만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도 남 전 부회장이 용퇴를 결심한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대체로 LG전자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이 2분기보다도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영업적자 가능성을 예상하기도 한다.

구 부회장도 취임과 함께 휴대폰 사업의 극대화를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구 부회장이 나설 때마다 내부적으론 남 전 부회장 그림자 지우기라는 논란에 빠졌다.

‘휴대폰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들어간 것도 남 전 부회장의 그림자 지우기 논란의 한 축을 담당했다.

구 부회장은 취임사에서 “특히 스마트폰 중심의 휴대폰 사업에서 LG의 위상은 불과 1년 전의 성과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면서 “시장 판도를 바꾸는 혁신적인 제품을 남보다 먼저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취임사와 동시에 구 부회장이 본 ‘첫 업무'도 ‘휴대폰'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날 구 부회장은 자신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임원인사를 단행했다. 바로 TV와 휴대폰 분야다.


외국인 임원과 결별

이전까지 TV와 휴대폰 사업을 총괄했던 HE사업본부장과 MC사업본부장을 실적 부진 등의 책임을 물어 한꺼번에 교체했다. 구 부회장은 HE사업본부장에 권희원 부사장, MC사업본부장 겸 스마트폰사업부장에는 박종석 부사장을 새로 임명했다. 인사 칼날의 서막이었다.

조직 개편에서 LG전자는 남 전 부회장이 대거 영입했던 외국인 ‘C' 레벨 임원들과 결별했다.

더모트 보든 최고마케팅책임자(CMO) 부사장 등 계약 만료가 임박한 3명의 임원에 대해서는 연장을 포기했고 피터 스티클러 최고인사책임자(CHO) 부사장,브래들리 갬빌 최고전략책임자(CSO) 부사장 등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사람들과는 합의를 통해 계약을 해지했다. 올 초 공석이 된 최고유통채널책임자(CGTMO)를 포함, 최대 6명에 달하던 외국인 최고 임원을 모두 내보냈다.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LG Way(LG 방식)'를 철저히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구 부회장의 판단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역시 남 전 부회장 그림자 지우기 논란에 빠졌다. 이들을 영입한 사람이 남 전 부회장이었기 때문.

결정타는 남 전 부회장 시절 전사 차원에서 추진했던 ‘영어 공용화’계획이 사실상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는 것. LG전자에 따르면 구본준 부회장이 최근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영어로 업무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후 영어 업무가 크게 줄었다고 한다.

LG전자가 영어 공용화 계획을 접은 것은 업무상 반드시 영어를 써야 하는 경우가 아닌데도 영어로 소통하려고 하는 것이 불필요한 낭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LG전자는 남 전 사장 취임 이후 글로벌 기업 도약을 목표로 2008년부터 영어 공용화를 실시해 경영 회의는 물론이고 보고서 작성 등 서류 작업을 영어로 해왔는데, 하루아침에 이것도 사라지고 말았다.

때문에 가부장적 문화가 컸던 LG로서는 충격이라는 반응이다. 일부 직원들도 갑작스런 변화가 적응이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직원은 “영어사용이나 외국인CEO 영입은 주로 남 전 부회장이 맡았던 일이다. 그 분들이 다 퇴사하는 것은 끈이 떨어졌다는 의구심이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실적이 부진한 책임자의 사퇴는 당연한 것이지만 한 번에 관련 핵심 인원이 다 빠진 것은 극히 드문 사례라는 설명이다.

LG의 한 관계자는 “새 경영진이 과거의 실적하락을 답습하지 않기 위한 처사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일각에선 구본준 부회장이 인사부터 전 분야를 챙기고 있어 내년 상반기 실적비교가 어떤 결론을 낼지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이범희 기자] skycro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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