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자금출처 의혹 해소 못하면 ‘장기 표류’

현대건설 매각작업이 장기 표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현대그룹이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과 동양종금의 자금출처를 14일까지 밝히지 않을 경우 자칫 소송전에 휘말리며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양해각서(MOU) 해지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고, 현대차그룹은 매각 주관사인 외환은행 실무자 3명을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압박하고 나섰다.

채권단도 MOU 해지를 거론하며 자금출처를 밝히라고 현대그룹을 몰아 세우고 있다. 현대차그룹에는 검찰에 고발할 경우 예비협상 대상자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금융권에서도 소송전이 난무하자 매각작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현대건설 매각 작업의 시나리오도 복잡해지고 있다.

현재 가능한 시나리오는 3가지다. 채권단이 현대그룹이 낸 추가 자료 제출을 인정해 매각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자격을 박탈해 현대차그룹과 매각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매각작업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시나리오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해도 대규모 소송전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뢰에 금이 간 상황에서 채권단이 어떤 선택을 해도 상대에게 믿음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권단은 "공정한 절차대로 매각작업을 진행할 것"이라며 문제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채권단 관계자는 13일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법적 대응에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향후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채권단, 현대그룹 MOU 해지 압박·현대차에 경고

일단 채권단은 지난 7일 현대그룹이 14일 자정까지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 예치금 1조2000억원에 대한 대출계약서나 구속력있는 ‘텀시트(세부계약 조건을 담은 문서)’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현대그룹이 끝내 증빙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채권단은 양해각서(MOU) 해지를 위한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MOU가 해지되면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도 박탈된다.

다만 현대그룹이 최근 법원에 제출한 ‘MOU 해지금지 가처분신청’의 결론이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법원이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면 현대그룹은 증빙자료를 제출하지 않아도 양해각서 효력이 유지돼 매각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채권단이 주식매매계약(SPA) 체결에서 부결시킬 가능성이 높다. SPA 부결은 주주협의회 20% 이상만 동의하면 된다.

현대차그룹에 대한 채권단의 대응도 관심거리다. 지난 10일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의 대출계약서 제출 요건을 완화해 준 외환은행에 소송을 내겠다며 고강도로 압박했다.

이날 현대차그룹은 김효상 외환은행 여신관리본부장 등 실무담당자 3명을 입찰방해 및 업무상 배임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 및 수사의뢰했다. 또 이들 3명과 외환은행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50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함께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 행동에는 들어가지는 않았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아직 외환은행 및 실무자 3인에 대한 검찰 고발과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며 “내부적으로 법률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해 제출을 미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외환은행은 현대차그룹이 은행을 상대로 실제 소송에 나설 경우, 현대차그룹의 예비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매각 주체를 상대로 소송 등의 이의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밝힌 입찰확약서 조항에 따른 것이다.

채권단 관계자는 이날 “현대차그룹이 아직까지도 고발장을 접수하지 않은 것은 자체적으로 법리 검토를 해보니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자신들의 지위에 심각한 변동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어 “채권단에 계속 압력을 가한다고 언제까지나 밀릴 것으로 생각했다면 오산”이라며 “현대차가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정 수준의 ‘경고’는 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채권단이 실사 단계에서 문제 제기를 하거나 본계약에서 발을 뺄 가능성도 있다. 본계약 단계에서 주주협의회 결의로 계약 체결이 무산되면 현대그룹도 소송을 제기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법원 결정과 별개로 현대그룹이 14일까지 대출계약서나 텀시트를 제출할 경우 매각 절차는 그대로 진행된다. 이미 채권단은 지난 7일 현대그룹에 보낸 공문에서 기존 방침인 ‘대출계약서’ 대신 ‘대출계약서나 텀시트’로 요구 조건을 바꿔줬다. 계약서 대신 그에 준하는 서류를 내도 인정하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채권단은 계약서와 부가서류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더 강화된 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난 10일 현대차그룹은 조건을 완화해 준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현대차그룹은 “대출 계약서 대체 요구는 주관기관으로서 의무위반, 도적적 해이를 넘은 범법행위”라며 “현대건설 입찰 정상화를 위해 손배소를 제기하는 한편 피고발인 외에도 불법 행위 공모가담자 및 기관이 있을 경우 응분의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대그룹, 증빙자료 제출 사실상 거부

논란의 핵심인 현대그룹은 14일까지 대출계약서나 세부계약 조건을 담은 ‘텀시트’를 제출하라는 채권단의 요구에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런 증빙자료 제출 요구는 합당한 요구가 아니다”면서 “채권단을 상대로 현대건설 매각 양해각서 해지금지 가처분을 법원에 신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사실상 증빙자료 제출 거부로 해석된다.

만약 현대그룹이 증빙자료 제출을 거부할 경우 채권단은 주주협의회를 열어 양해각서 해지 절차를 밟게 된다. 이 경우 양해각서를 해지해도 채권단이 예비협상대상자인 현대차그룹과 매각 협상에 나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현대그룹이 증빙서류를 제출해도 자금출처에 대한 의혹이 해소되지 않으면, 현대차그룹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으로 보여 본계약 체결도 어려울 수 있다.

채권단이 현대차그룹과 협상에 나설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현대그룹이 반발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어느 쪽이든 소송을 내면 최종 대법원 결정까지 최소 3년 이상 걸린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 채권단이 얽히고설킨 만큼 현대건설 매각 작업이 장기 표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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