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김일성과 무바라크의 맹약 깨는 것 상당히 어려워”

무바라크 대통령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술레이만 정보부장 설득을 위해 그런 시너지를 설명하는 접근이 굉장히 유효했던 것 같은데?

▲인간적으로 접근했다. 인간적인 교분을 오래 나누다 보니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날 좋아하게 됐다. 급기야 그분이 방한을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밀 방한 추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쉽게 결정하지 않았다. 역시 김일성과 무바라크의 약속 때문이었다. 무바라크는 군인 출신인데 군인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과 무바라크의 맹약을 깨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이 밖에도 이집트 국민과 친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문화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그림 전시회나 문화사절단 공연, 음식축제 개최 등 화려한 각종 행사를 활발히 펼친 덕에 ‘알하람’이 우리 행사를 보도하면서 한국이 수교 축제를 벌이고 있다고 오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알하람’은 어떤 곳인가?

▲‘알하람’은 이집트의 최대 일간지로 중동 전체를 대표하는 언론매체다. 중공을 대표하는 언론매체가 오보를 낸 거다. 한국통영사관의 문화적인 접근 활동이 요란했던 것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앙드레 김 패션쇼도 하지 않았나?

▲문화외교 활동의 일환으로 앙드레 김 패션쇼도 했다. 수잔 무바라크 대통령 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앙드레 김이 패션쇼 수익금을 모두 영부인이 주관하는 어린이 독서 캠페인 재단에 기증했다. 이집트 대통령 영부인을 감동시킬 만큼 앙드레 김도 이집트 문명을 모티브로 한 의상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나? 정보부장이라면 대통령 최측근이니, 대통령의 허락이 있어야 방한이 가능 할텐데. 한국에서 그분을 초청해서 어떻게 대우를 했나?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행운을 가져왔다. 술레이만 정부부장 방한 초청장은 이미 전달됐지만 방한 시기가 결정되지 않고 있었다. 김일성 사망 소식이 수교의 분위기를 확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알하람’이 김일성 특집을 냈는데, 4차 중동전쟁 당시 북한 김일성이 이집트의 초전 승리에 기여한 사실에 대해서 보도가 나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에 대한 일반적인 기사만 크게 보도가 되고 정작 북한이 이집트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4차 중동전쟁에 관한 기사가 나지 않았다. 그런 언론 행태를 볼 때 이집트가 북한과 관련한 전쟁 기억을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됐다.

북한이 중동지역에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이집트와 시리아다. 김일성 주석은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과 시리아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과 특별히 가까웠는데, 이 두 대통령의 조문 행태가 대조적이었다.

알 아사드 대통령은 북한대사관에 비치된 조문록에 직접 서명하고 7일간의 조문 기간을 선포한 반면, 무바라크 대통령은 직접 가서 조문을 하지 않고 의전장을 보내 조문을 했다. 양 지도자의 조문 행태로 보아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을 더 이상 특별히 대접하고 있지 않다는 판단을 했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수교는 이제 시간문제이며 더 이상의 장애물이 없어졌다고 직감하게 됐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이후에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한국을 방문했나?

▲이병호 안기부차장이 이집트를 방문해 권영해 안기부장의 초청장을 직접 전달한 바가 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초청 절차가 빠르게 진척되어 1994년 10월에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방한했다.

 

-장승길 씨는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아닌가?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는 김영섭 대사였는데 65세 정년이 되어 1994년 6월 귀국하고 후임으로 장승길이라는 40대 대사가 부임했다. 나이가 어려 의아하게 생각했다. 신임 북한대사의 영문 이름이 ‘Jang Seung Kil’로 표기되어 있어서 나는 ‘장성길’로 오인하고 장성택 동생이기 때문에 출세를 빨리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장성길’이 아니고 ‘장승길’이다. 장성택 동생은 아니었다. 장승길 대사는 중동 전문가로 중동 담당 부부장(차관급)을 역임한 후 주이집트 북한대사로 임명됐다.

그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에 카이로에 도착해 7월 12일 신임장을 제정할 예정이었는데 무바라크는 조문 기간이기 때문에 신임장을 제정할 수 없다는 구실로 12일 신임장을 제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의 외교 행태가 장승길 대사한테는 완전히 외교적인 재앙이 됐다.

다음 신임장 접수일이 몇 달이나 늦어지는 바람에 일찍 부임을 했지만 공식활동을 제대로 못했다. 김일성 사후에 급박하게 변화하는 한국과 이집트 관계 발전에 제대로 대처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 측에는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권영해 국정원장은 방한한 술레이만 정보부장을 특별 대접해 줬다. 귀국한 후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보고된 정보부장의 수교 건의 보고서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물론이다.

 

-술레이만 정보부장이 김영삼 대통령도 만났나?

▲수교 전이라서 김영삼 대통령과의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권영해 원장과의 면담으로 충분했다. 수교 관련 특기사항이 또 하나 있다. 

이스라엘은 북한의 대중동 미사일 판매를 안보 위협으로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당시 핀란드 주재 북한대사인 김평일과 접촉해 대중동 미사일 판매금지 협상을 전개한 사실을 주핀란드 이집트대사가 카이로에 보고한 것이다. 이 정보가 북한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나는 무바라크를 공략하기 위해서 술레이만을 접촉하면서도 무바라크 대통령의 외교비서관인 아브라함 시하타 대사를 자주 접촉해 도움을 받았다. 그는 나중에 주러대사가 됐는데 내가 주러대사가 될 때까지 재직해 모스크바 동료가 된 잊지 못할 사람이다.

결국 1995년 4월 13일에 수교를 하게 됐다. 수교 며칠 전에 대통령이 수교 서류에 서명을 했다고 알려준 사람이 시하타 대사다. 나는 무바라크 대통령이 수교 문서에 서명한 사실을 공로명 장관에게 전화로 제일 먼저 알리고 공로명 장관은 즉각 김영삼 대통령께 알렸다. 

그후 양국 외교부에서 수교 절차가 진행돼 수교 문서 서명식은 이집트 외무성에서 거행됐다. 아무르 무사 외무장관 입석하에 한국 정부를 대표하여 주카이로총영사인 나와 이집트 정부를 대표하여 아흐마드 아게지 의전장이 수교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수교가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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