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제때 잘 먹고, 또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어야 건강하다고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대선 초기 자신에게 그럴듯한 밥상이 차려지자 대권에 욕심을 가졌다. 지지율도 괜찮았다. 이렇다 할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던 보수진영에서도 비록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그를 대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먹기만 하면 되는 밥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쓴맛 나는 음식을 먹다가 기겁을 하고는 밥상을 뒤엎고 만 것이다.

그런 결과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쌓았던 명예가 순식간에 실추되는 치욕을 겪었다. 또한 ‘진보적 보수주의자’라는 정체불명의 정체성 커밍아웃으로 보수와 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꽃길만 걸어 왔던 관료 출신의 전형처럼 비쳤다.

그동안 뜸을 들이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마침내 온갖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진창의 정치계에 발을 담그기로 결정했다.

그의 ‘늦깎이’ 정계입문 배경에는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지지가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보수 진보를 총망라한 차기 대통령 선호도에서 1,2위를 다투는 데다 특히 보수진영에서는 잠재적 경쟁자들에 크게 앞서고 있다. 황 전 총리는 이를 ‘국민적 요구’로 받아들인 듯하다. “나라와 국민을 생각해서 움직이라는 명령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그의 말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하긴 보수가 지리멸렬하고 궁지에 몰릴 때마다 황 전 총리가 ‘보수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그럴 때마다 이렇다 할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2017년 조기 대선과 지난해 지방선거 때도 그랬듯이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계속 말을 아꼈다. 그런 그를 보고 세간에서는 황 전 총리가 그 같은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수군댔다. 권력을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반 전 총장처럼 권력이 자기 손에 쥐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 같은 행태로 봤을 때 황 전 총리는 그 후로도 정치적 역할론이 제기되는 시점마다 저울추만 들여다보다 포기할 공산이 높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게다가 그는 얼마 전에도 “깨질 각오가 돼 있다”며 권력의 의지를 보이는 듯했으나 이후 또 잠수를 타 지나치게 정치적 전개 상황을 재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랬던 그가 드디어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예상치 않았던 그의 전격 결심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있다. 유력한 대권주자가 한 명 더 늘어나자 여권은 물론이고 야권에서조차 심한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국정농단의 종범’이라느니 ‘무임승차’라는 등 황 전 총리를 원색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안타깝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게 됐든 보수진영만큼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없진 않지만 그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에게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게 맞지 않을까.

지금 보수진영은 사람이 귀한 상황이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어떤 이는 저래서 안 된다며 벽을 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않다. 솔직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에 책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보수진영 정치인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도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그가 정치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당헌과 당규에 따라 당원과 국민들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황 전 총리도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앞으로 상상할 수 없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인격 말살적인 모함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인척까지 탈탈 털릴 것이다. “내가 왜 이 진흙탕에 발을 담았을까”라는 후회를 수도 없이 하게 될 것이다. 남이 차려준 밥상에는 쓴 음식이 더 많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을 한 이상 반 전 총장처럼 쓴 음식 먹다가 갑자기 숟가락 놓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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