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시 암송이 끝나자 최해가 기다렸다는 듯 품평을 시작했다.

“눈과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새벽 산사의 풍경은 청정하고 깊은 익재의 정신적 수준을 드러냄과 동시에 지향점으로 해석되네. 익재의 반평생 시법이 이 시에 다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여 그 필명(筆名)을 중원에 떨친 대문호의 칭송을 받고 나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점심 무렵에 만난 두 사람은 적조하여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푸느라고 석양에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아쉬운 작별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서는 이제현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깊숙한 산골,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사자갑사의 들을 넘어 할미와 할아버지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의 호젓함은 최해의 성품을 말하듯이 가히 장관이었다. 동리 어귀의 갈대밭을 벗어나자 산새만 한가히 날아오르고 사위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기쁨은 나누면 커지고 슬픔은 나누면 작아진다’는 말이 있다. 스스로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늘 친구 최해의 안빈낙도하는 삶을 불안한 눈으로 바로보고 있던 이제현은 정과 눈물이 많은 풋풋한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난세를 구하려는 몸부림

원 황실은 1332년 2월 즉위한 후 2년 동안이나 폐정을 일삼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도 충혜왕의 못된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4년 후인 1336년 12월에 고려로 돌려보냈다.

1339년(충숙왕 복위8) 3월에 충숙왕이 흉서(薨逝, 왕의 죽음)하였다. 충숙왕은 평소 아들 충혜왕을 발피(撥皮, 망종이라는 뜻), ‘날건달’이라고 부르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죽음에 임박하자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충숙왕은 전후 2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46세에 죽었는데, 그에 대한 사관의 평은 인색했다.

충렬, 충선, 충숙, 충혜왕의 4대는 부자간에 서로 갈등이 생겨 심지어 원나라에까지 가서 시비질을 하여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겨놓았다. 또 부자간의 친애 관계는 모든 행실의 첫자리를 차지하며 또 정치의 근본이 된다. 그러므로 근본이 틀리고 보면 기타의 일이야 보잘것없는 것이다. 충숙왕은 늙어서 국사를 포기하고 지방과 교외에 가서 거처하면서 박청 등 내시 3명을 신임하였기 때문에 위엄과 행복이 부하들에게 옮겨져 아들이나 손자들이 다 천명대로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한탄을 어찌 다하랴.

한편, 고려 조정으로부터 충혜왕의 왕위 계승 통보를 받은 원나라 승상(丞相) 백안(伯顔)은 원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충혜왕이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으니 심양왕 왕고를 고려 국왕으로 삼아야 하옵니다.”

이 때문에 충혜왕은 한동안 원 왕실의 책봉문을 받지 못했다. 당연히 충혜왕과 심양왕 왕고 사이에 후계를 둘러싼 싸움이 재현되었다. 이것은 백안이 고려의 왕위계승 과정에 개입하여 심양왕 왕고를 고려왕으로 옹립하려 한 결과였다.

조적은 역리(譯吏) 출신의 간신배다. 그는 충숙왕이 복위하자 원나라 승상 백안의 후원을 받고 있는 심양왕 왕고와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 찬성사를 거쳐 첨의좌정승에 올랐다. 그는 갖은 중상모략으로 충혜왕을 헐뜯었으며, 심양왕 왕고와 모의하여 그를 옹립하려 하였다.

이에 충혜왕은 “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노라”고 선전하면서 방(榜)을 붙여 조적의 무리를 비난하였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조적과 홍빈·신백·황겸·백문거 등 정동행성의 관리, 그리고 조염휘·이휴·이영부 등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의 군사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왕궁을 습격했으나 충혜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해 반격해오자 결국 패퇴하게 되었다.

조적은 충숙왕 비 경화공주(慶華公主)의 처소에 숨었다가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조적의 난’은 진압되었다.

1339년 3월, 충숙왕이 서거하자 조적의 난을 평정한 후 곧이어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충혜왕은 색(色)을 밝히기로는 조선조 연산군과 비교해 둘째가라면 서러운 희대의 패륜아였다. 충혜왕의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와 찬성사 윤계종의 딸 희비 윤씨였다. 또한 후궁만도 1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충혜왕은 왕위에 복위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을 일삼기 시작했다. 복위 두 달 후인 그해 5월에는 충숙왕의 장례를 끝내기도 전에 부왕의 후비인 수비(壽妃) 권씨를 폭행 강간하였다. 마침내 수비 권씨는 수치심을 못 이겨 이듬해 4월에 자살하고 말았다.

경화공주(慶華公主)는 몽골 여자로 이름은 백안홀도(伯顔忽都)이다. 충혜왕은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를 초청해 영안궁(永安宮)에서 여러 차례 잔치를 연 적이 있었다. 그해 8월 그믐날이었다. 이날은 경화공주가 그 답례로 충혜왕에게 연회를 베푼 자리였다. 충혜왕은 외로움을 홀로 달래고 있는 경화공주에게 음심(淫心)을 품고 말했다.

“모후, 얼마나 적적하십니까?”

“주상이 이렇게 나를 자주 위로해 주니 어려움이 없어요.”

“앞으로 부왕을 대신해서 제가 공주를 위로해 드리겠습니다.”

“…….”

달이 이지러질 무렵에 잔치가 끝이 났다. 그러나 충혜왕은 술에 취해 잠에 떨어진 체하며 물러나지 않고 있다가 한밤중이 되자 침실로 들어가 경화공주를 덮쳤다.

경화공주는 순간 수비 권씨 강간사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충혜왕을 노려보며 거세게 저항했다.

“주상, 이 무슨 해괴한 짓이오!”

“공주, 제발…….”

“주상, 이 몸은 주상의 어미뻘이오. 이래서는 아니 되오!”

“여봐라, 경화공주의 팔다리를 잡지 않고 무엇하고 있느냐!”

충혜왕이 악을 쓰자 내관 송명리(宋明理) 등은 경화공주의 팔다리를 잡고 꼼짝 못하도록 하고 입을 막았다. 한 마리 야수로 돌변한 충혜왕은 거친 손으로 경화공주의 옷을 난폭하게 벗기고 겁탈했다.

“짐승보다 못한 놈!”

군부판서(軍簿判書, 무관선임과 군무를 관장하는 군부사의 으뜸 벼슬)를 역임한 이조년(李兆年)은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시조로 유명하지만, 직간(直諫)을 잘하는 절개 높은 선비였다. 충혜왕은 이조년의 발소리만 들어도 그가 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조년이 온다. 조년이 와” 하며 몸을 단정히 한 뒤 기다렸다.

이조년은 충혜왕에게 “음탕함을 중지해 주시옵소서” 라며 여러 번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이듬해인 1340년 사직하고 한거(閑居)에 들어간다.

충혜왕은 이조년의 충간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신(儒臣)들과 반목이 깊어갔다.

원나라로 압송되는 충혜왕

그해(1339년) 11월.

경화공주가 원나라에 밀사를 보내 충혜왕을 고발한 결과, 원 조정에서는 경악하여 중서성 단사관 두린(頭麟)과 직성사 구통(九通)을 원 황제의 사신으로 개경에 파견했다. 경화공주를 겁탈한 충혜왕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지은 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충혜왕은 신하들을 소집한 후 말했다.

“두린과 구통이 무슨 일로 고려에 온다는 말이오. 그들을 어떻게 맞이하면 좋겠소!”

“…….”

신하들 중 아무도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자, 그때 기철이 계책을 내놓았다.

“고려 인삼과 은자로 원 사신들에게 선물함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렇게 준비하라.”

충혜왕은 선의문 밖에 나아가 원나라 사신들을 맞이하였다.

“원로(遠路)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두린 등은 충혜왕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우리는 경화공주를 먼저 뵈어야 하오.”

사신 일행은 충혜왕을 거들떠보지않은 채 경화공주가 거처하는 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신들이 경화공주에게 황제가 내리는 술을 올리자, 경화공주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일을 울면서 털어놓았다.

“충혜왕은 짐승보다 못한 자이니 반드시 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치를 떨며 분개하여 입궐했다. 그리고 국새를 빼앗아 경화공주에게 넘겨주었다. 이윽고 충혜왕과 측근 신하들이 원나라로 압송되자 경화공주가 임시 국왕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