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김대중 전대통령)와 이회창 전한나라당총재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퇴임후 대외활동을 자제하며 주로 동교동 자택에서 칩거해 왔던 DJ는 정치적 고향인 광주 방문을 시작으로 해외방문 등 대외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이 전총재도 불법정치자금 사건이후 은인자중했던 행보를 뒤로 한채 개인사무실을 개소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예고하고 있다. 두 거물 정치인의 이러한 움직임에 정치권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두 사람이 비록 정계를 은퇴하긴 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두 사람이 97년 대선을 방불케 하는 치열한 대리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란 섣부른 관측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DJ와 이 전총재는 지난 97년 대선때 한 차례 맞붙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DJ의 승리로 끝난 97년 대선이후 이 전총재는 절치부심 재기를 노렸다. 2002년 대선때 재수에 나선 이 전총재는 또다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뒤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권좌에서 물러난 DJ나 재수에 실패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 전총재나 지난 2002년 대선은 많은 아쉬움과 적지 않은 시련을 안겨줬다.참여정부 출범이후 DJ의 최대 치적이었던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특검을 수용함으로써 그 빛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DJ는 박지원 전청와대비서실장 등 핵심측근들이 특검팀에 의해 ‘영어의 몸’이 되는 처지를 힘없이 바라봐야 했다.

권좌에서 내려오자마자 권력의 무상함을 피부로 절감해야 했던 것. 특히 참여정부가 자신이 주도해 만든 민주당을 근간으로 출범한 정권이란 점을 감안하면 DJ의 서운함은 말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DJ가 퇴임후 대외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며 칩거했던 배경에는 현정부에 대한 배심감과 더불어 재판에 계류중인 측근들에게 행여 불리하게 작용될지 모른다는 기우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란 관측도 없지 않았다.이 전총재도 두 차례의 대선 패배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시련의 길을 걸어야 했다. 불법대선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측근들이 줄구속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회창 사법처리설’이 나돌면서 자신 또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이처럼 DJ나 이 전총재는 현 정부에 대해 적잖은 서운함과 불만을 품고 있다.

두 사람이 최근 정치행보를 가시화하고 있는 배경에는 현정부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이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또 정치권 관계자들은 두 사람의 정치행보 지향점은 차기 대권구도에 맞춰져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권력 속성상 현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할 수 없는 정치현실을 감안하면 차기 대권구도에서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 자신이 밀어준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는데 일조할 것이란 관측. 즉, DJ나 이 전총재는 참여정부 출범이후 손상된 정치적 오명을 차기 정권창출에 기여함으로써 대리만족 내지는 명예회복을 꾀할 것이란 분석이다.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DJ-이회창 97년 대선 대리전’ 플랜도 이러한 분석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또 정치활동 재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두 사람의 최근 행보도 대리전 플랜을 부추기고 있다.DJ는 지난 11월 1,2일 양일간 정치적 고향인 광주를 방문했다. 박광태 광주시장의 초청 형식으로 이뤄진 DJ의 광주 방문 배경을 놓고 정치권은 갖가지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DJ측은 확대 해석을 경계했지만 DJ가 퇴임후 첫 지방 방문지로 광주를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정치권은 DJ의 광주 방문을 앞으로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걷겠다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관련 동교동계의 한 핵심관계자는 9일 기자에게 “그동안 DJ가 대외활동을 자제했던 배경에는 박지원 전실장 등 구속된 측근들의 재판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기우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특히 DJ의 복심으로 통했던 박 전실장이 줄기차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고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 가능성을 인지한 후 대외할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박 전실장이 무죄를 선고 받을 가능성이 높고 이를 인지한 DJ가 스스로 족쇄를 풀고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걷게 될 것이란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이 관계자의 말을 전해들은 기자는 DJ의 대외활동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공감을 했지만 박 전실장이 무죄를 선고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 관계자의 말은 3일후 현실화 됐다. 12일 현대비자금 150억원 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박 전실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정치권 관계자들도 박 전실장이 사실상 무죄를 선고 받은 만큼 DJ의 정치 보폭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DJ가 얼마전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한 것이나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온 ‘DJ 대북특사론’과 관련해 한 발 빼는 모양새를 취한 배경에는 DJ의 의도된 전략이 내포돼 있을 것이란 관측도 없지 않았다.따라서 대법원 판결이후 DJ의 향후 정치행보는 더욱 확대될 것이고, 그 지향점은 차기 대권구도에 맞춰져 있을 것이란 관측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이 전총재도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전총재는 불법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된 시점부터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지난 4월말 선친의 묘를 이장한 것을 비롯해 얼마 전에는 서울 남대문로에 개인사무실을 마련했다.

특히 충남 예산에 위치한 선친 묘를 한때 ‘왕기 서린 명당’으로 화제가 됐던 신양면 하천리로 이장한 것과 관련해서는 뒷말도 무성했다. 92년 대선 패배후 정계를 은퇴했다 95년 정계에 복귀한 DJ가 경기도 용인군으로 선친 묘를 이장한 후 97년 대선때 당선된 사례에 비춰볼 때 이 전총재도 꺼지지 않은 ‘대망론’을 염두에 두고 선친 묘를 이장했을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았던 것.실제로 이 전총재는 비록 정계은퇴를 선언하긴 했지만 여건이 성숙되면 언젠가 다시 정계에 복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시각이 많았다. 정치권 주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이른바 ‘이회창 정계복귀설’은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정가 소식통들은 이 전총재가 다시 정계에 복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데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군다나 이 전총재가 ‘대망론’을 꿈꾸기에는 정치환경이 너무 바뀌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전총재의 성격이나 정치스타일, 그리고 급변하고 있는 정치환경을 감안하면 ‘이회창 정계복귀설’은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이들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오히려 이들 소식통들은 이 전총재가 한나라당이 정권을 다시 잡는데 일조함으로써 두 차례의 대선패배 오명을 씻으려 할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있다. 실제로 이 전총재는 보수·기득권층으로부터 아직도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다.

또 한나라당내에도 그를 추종하는 정치세력이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내 차기 대권주자들이 이 전총재에게 보이지 않는 구애의손길을 보내고 있는 배경에는 이 전총재의 식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이처럼 차기 대권구도와 관련해 DJ와 이 전총재의 역할론이 급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 두 거물정치인의 향후 정치행보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 두 거물의 마음을 잡기 위한 여야 차기주자들의 구애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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