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1990년 소련과 수교 후 주대한제국 러시아공관 반환 요구
당시 2400만 달러에 해당되는 원화 받기로 하고 문제 종결

주한 러시아대사관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주한 러시아대사관 부지 문제도 있지 않았나? 그때 대사가 그 문제를 해결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해결했나?

▲1990년 소련과 수교를 했는데 수교하자마자 주한 러시아대사관 부지 문제가 제기됐다. 러시아대사관 부지는 우리에게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장소다. 고종 황제가 1896년 아관파천을 하지 않았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한 이래 러시아와는 외교단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주대한제국 러시아공관이 폐쇄된 해가 1905년이다.
1905년부터 1990년까지 85년 동안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러시아 공관이 문을 닫고 나서, 러시아는 한 번도 대사관 부지에 대해서 거론하거나 소유권 청구 요청을 한 바가 없다. 85년이라는 세월 동안 러시아공관 부지의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다. 러시아의 부지 소유권이 소멸된 상태였다가, 수교를 하자마자 러시아 측은 옛날에 민씨 일가로부터 땅을 구매했다는 매매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공관 부지를 반환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 러시아 측이 그 매매계약서를 가지고 있었나?

▲ 러시아 정부와 한국 정부는 러시아대사관 부지 문제에 관해 법률적 논쟁을 하게 됐다. 우리 측은 러시아대사관 부지 소유권은 한국의 적법한 절차에 의해 소멸되었다는 논거를 가지고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보상 의무가 없지만 한·러 관계의 중요성을 고려해서 토지 보상을 해주기로 하고 외교적인 합의를 했다. 러시아도 사정의 변경을 인정하고 보상 협상에 응해서 당시 2400만 달러에 해당되는 원화를 받기로 하고 문제를 종결하기로 결론을 냈다.
한·러 합의문서가 양국 의회를 통과해 비준까지 된 상태에서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환율이 오르니까 러시아 정부가 합의된 원화가 아닌 미화 상당액인 2400만 달러를 달라고 요청을 했다. 
우리 정부는 양국의 보상 합의에 따라 예산을 책정하고 집행 단계에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정빈 주러시아 한국대사를 러시아 외무성으로 불러 달러 금액을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국회를 통해서 비준된 협정문에 따라 러시아 측 요구를 수락할 수 없다고 통보를 했다. 러시아의 억지 요청에 대해 기획관리실장인 내가 아파나시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를 불러 우리 입장을 설명했다.
“러시아가 양국 간에 정식 합의되고 국회에서 비준까지 된 협정과 다른 내용의 요구를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고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졌을 때는 러시아가 비난을 받지 우리 정부가 비난받을 사항이 아니다. 합의를 위약하면 책임은 전적으로 러시아 측에 귀결된다. 지금 빨리 원화를 받아 은행에 집어넣으면 이자율이 상당히 높아 이익을 볼 수 있으니 원화를 받아 빨리 공사를 시작하는 것이 러시아에게 득이 된다”라고 설득해서 납득시켰다. 
1997년 12월 31일 러시아가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 해결했다. 우리 정부는 배재고등학교 부지를 러시아공관 부지로 알선해 준 굿 오피스를 제공해 주한러시아대사관 건립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었다.

- ‘굿 오피스’의 의미는?

▲ 외교적 행정편익 같은 회의적 조치를 제공해주는 행위를 외교 용어로 ‘주선’이라고 하는데, 영어로는 ‘굿 오피스’라고 쓴다. 배재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을 하게 됐는데, 정부가 중간에 개입해서 러시아 정부가 구입하도록 해 대사관 건립 문제를 해결했다. 그것이 지금 현재 정동에 있는 러시아대사관의 건립 경위다.

- 위치가 아주 좋은 것 같은데?

▲ 위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건물도 잘 지었다. 러시아 정부는 우리 정부가 제공한 혜택을 많이 봤다.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의 경우는 러시아 땅을 우리 정부가 사서 지었는데, 러시아 측에서도 모스크바시가 우리에게 굿 오피스를 해주었다. 부지뿐만 아니라 집 짓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에 특별히 호의적인 조치를 해줬다. 주러한국대사관도 좋은 위치에 훌륭하게 건립됐다. 주러한국대사관은 위치와 건물미가 뛰어나 손꼽히는 명소가 됐다.

-대사는 요직인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고 1998년 초에 주이탈리아대사로 발령을 받았다. 재임 중에 김대중 대통령이 이탈리아를 방문했는데, 한국의 국가원수로서는 첫 국빈 방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200년 3월 김대중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면?

▲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해 박정수 전 의원을 김대중 정부 초대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장관 교체에 따른 업무를 내가 담당했다. 나는 박정수 장관이 안착하도록 보좌하고 주이탈리아대사로 임명을 받아 서울로 떠났다. 내 후임으로 신성오 대사가, 이기주 차관 후임으로 선준영 주제네바대사가 임명됐다.
1998년 3월 로마에 부임했는데 재임 중 있었던 중요한 현안은 북한과 관련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교류·협력을 통해 북한을 국제사회에 하나의 책임있는 일원으로 끌어낸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 교류·협력을 촉진해서 북한 스스로가 변할 수 있는 국제 환경을 만든다는 정책 기조로 국정을 운영했다. 남북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제로섬게임을 하기보다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는 공존정책을 취했던 것이다.
과거 정부에서는 EU 국가가 북한과 수교 또는 교류하지 않도록 해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외교 목표였다. 이후 역발상으로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기 위해 EU 국가가 북한과 수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태동됐다.
이탈리아는 영국·프랑스·독일과 대조해서 정치적으로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밀리고, 경제적으로는 독일에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독일·프랑스와 다른 틈새를 노리는 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중견국 그룹을 형성해 리비아·이란·쿠바 접근 등 독자적 목소리를 내는 외교 특색이 있다. 이탈리아는 EU 국가 중 처음으로 북한과 수교를 추진했는데 우리 정부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서방 국가와 북한의 수교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서 이탈리아와 북한의 수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용인했다. 적극적인 북한 개방화 전략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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