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시민들은 탄핵 정국은 물론이고 탄핵 후 영어의 몸이 된 후에도 매 토요일마다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박 전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렇게 2년이 넘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박 전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일까.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난 후 김계원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한 박 전 대통령은 그 비통함 속에서 “휴전선은요?”라고 물었다.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아버지의 총격 사망 소식에 고작 27세밖에 되지 않은 딸의 말이라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1974년 8.15 경축행사장에 숨어든 문세광의 흉탄에 의해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그 후 5년간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하면서, 또 아버지와의 수행 차량 내 대화와 밥상 대화를 통해 외교를 배웠다. 때로 대통령 주재의 청와대 안보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대통령 다음으로 안보상황을 잘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외교·안보적 소양이 주체 못할 충격 상황에서 휴전선을 걱정하는 통치자적 사고를 갖게 했을 터다. 유사시의 국가 안보 이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보수층은 혼비백산할 비보를 접하고도 국가 안위를 걱정하는 박 전 대통령의 의연함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청와대에서 나와 자연인으로 돌아갔던 박 전 대통령이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나라가 이렇게 몰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명분으로 정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정치권은 그의 정치력에 물음표를 달며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의 국회의원 당선을 아버지 후광쯤으로 치부하는 기류가 강해 보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이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을 잇따라 위기에서 구해내 ‘정치인’으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4년 ‘차떼기’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에 휘말리는 등 비상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대표는 참패가 예상됐던 17대 총선에 ‘천막당사’ 카드로 선방하는 지도력을 선보였다.

박 전 대통령의 진가는 2006년 지방선거 때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유세 도중 ‘커터 칼’ 테러를 당해 입원한 상태였는데도 회복 후 제일 먼저 “대전은요?”라고 당 관계자에게 물었다. 이 발언은 ‘대전시장 선거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혀져 여론조사에 훨씬 뒤지던 후보자가 상대 후보였던 현역 대전시장을 꺾는 뒤집기에 성공했다.

박 전 대통령의 탁월한 정치력은 이후 2008년 총선 때 절정에 달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한 뒤 자신을 따르던 친박계가 다음 18대 총선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자 무소속 친박연대로 출마한 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촌철살인’의 필살기를 날렸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신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창당 대신 ‘무소속 연대’를 권유했다. 그래야 자신이 간접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명분이 있다고 이들을 다독였다. 박 전 대통령도 친이계의 ‘공천학살’에 반발해 탈당할 수도 있었으나 당에 남는 것이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정치적 판단은 적중했다. 친박연대와 무소속 연대로 총선에 출마한 친박계 인사 다수가 18대 국회에 재입성한 것이다. 보수층이 열광했고, 이 같은 정치력으로 박 전 대통령은 18대 대선에서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랬던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과 함께 자기 덕에 살아 돌아온 정치적 동지들에 의해 배신 탄핵 당해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영어의 몸이 되자 정통 보수층이 아연실색했다. 밀려드는 동정심과 함께 그에 대한 추억이 날갯짓하면서 주말만 되면 서울역 광장, 대한문 앞 태극기 집회로 발을 옮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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