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처럼 전설이 된 기황후는 베갯머리송사로 원나라 황제를 주물렀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기황후의 문중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벼슬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왔다. 그 갑작스런 벼슬은 요술방망이가 되어 황금과 문전옥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세상의 민심은 세(勢)를 따르기 마련인 법이다. 기철을 중심으로 한 기당(奇黨)을 향하여 권력은 빠르게 움직였다.

때마침 연경에서 강릉대군 왕기(王祺, 나중의 공민왕)를 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던 이연종이 귀국하자마자 이제현의 집을 찾았다. 이연종은 이제현에게 원나라 조정과 연경의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기황후는 고려의 미인들을 많이 데리고 있으면서 권세 있는 대신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리하여 연경의 고관대작들은 반드시 고려 여자를 얻은 뒤에야 명가(名家)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태반이 고려 여자입니다. 따라서 의복과 신발, 모자, 물건 등이 모두 고려의 것을 따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으음. 기황후가 미인계를 써서 자신의 지위와 권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구먼.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입지가 강화되는 것이 고려에 그리 나쁠 이유는 없겠지만, 기황후의 일족들이 그녀를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릴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하니 그것이 걱정이오.”

이제현은 괴로움에 젖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연종이 돌아간 후, 그는 세상만사엔 오불관언(吾不關焉)하며, 두문불출하고 다시 긴 칩거에 들어갔다.

동짓날이 돌아왔다. 양기가 승하기 시작하는 동지를 맞아 이제현의 집에서는 역귀를 막는 팥죽을 끓이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윽고 섣달그믐(除夕, 제석)이 다가왔다. 조리 장수들이 마을을 돌며 복조리를 파는 소리가 간간이 사랑방까지 들려왔다.

이제현은 사당에 참례했다. 그리고 집안의 웃어른을 찾아뵙고 묵은세배를 올렸다. 그날 밤 식구 수대로 등잔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대궐에서는 여느 섣달그믐 밤처럼 역질(疫疾)이나 귀신을 쫓기 위해 ‘나례’가 행해졌다. 온갖 잡기(雜技)가 벌어졌고, 임금도 친히 나와 구경을 했다.

해가 바뀌어 1341년(충혜왕 복위2) 정월 초하루. 이제현은 세배객을 맞았다. 이곡, 안보, 백문보, 윤택, 이승로를 포함한 문생들이 해마다 정초 인사로 스승 이제현을 찾았다. 세찬(歲饌)으로는 꿩고기로 끓인 만둣국과 떡국이 나오고 세주(歲酒)로 고려 인삼주가 나왔다.

세배를 끝마친 제자들 중 이곡이 말했다.

“스승님, 올해로 저도 불혹(不惑)의 나이를 훌쩍 넘겼사옵니다.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비는 신년시를 지어 올립니다.”

아이들이 모두 새봄을 보고 기뻐하며
폭죽과 도부로 귀신을 쫓아내네.
우습도다. 나도 옛날에는 너희들과 같았는데
지금은 자꾸 나이 먹는 것이 두렵구나.

도부(桃符)는 신년 초에 복숭아나무로 만든 판자(桃木板) 두 개에 신도와 울루(鬱壘)라는 두 신의 이름을 문 양쪽 옆에 써서 걸어 나쁜 귀신을 물리쳤던 풍습이다.

이제현은 이곡의 신년시에 대한 답례로 신년 덕담을 했다.

“가정은 작년 최해의 죽음을 보고 느낀 점이 많은 모양이군. 가는 세월을 누가 막고 흐르는 강물을 누가 멈출 수 있겠는가. 호시우보(虎視牛步)라는 말처럼, 올 한 해는 호랑이의 눈처럼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과 소의 걸음처럼 우직하고 신중함을 갖고 나가세. 그러다 보면 우보천리(牛步千里)할 수 있지 않겠는가. 먼저 간 최해가 못 다한 일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지. 남은 세월 최해의 몫까지 다 해보세.”

1342년(충혜왕 복위3) 6월 초하루. 조정에서는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을 실시하였다. 충혜왕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역적 조적이 난을 꾸민 뒤 과인이 원나라로 잡혀가게 되었을 때 간신의 잔당들은 거짓말을 조작하여 반란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과인을 시종한 신하들이 시종일관 절개를 지켜 과인의 몸을 보호하였으니 그 공은 산천이 변하여도 잊을 수 없다.

윤석·채하중·홍빈·김영돈·김륜·이제현·이조년·한종유·배전·최유·강윤충·손수경 등을 일등공신으로 책봉한다.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하고 토지 1백결, 노비 10명을 줄 것이다.

이제현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지만,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이는 자신이 사관(仕官)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세 가지 사항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즈음 이제현을 시기하는 세력들에게는 세대가 교체되는 희망의 시대가 되고도 남는 세월이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 이제현은 산림처사로 저술활동에만 전념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무신란과 몽골의 침입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는 일과 민족사의 자주성을 키워 나가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한 시대적 과제이다. 원나라 간섭을 뚫고 이러한 시대적 소명을 수행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의식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불러일으키자. 이것이 이 시점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일 수도 있을것이야…….

민족자존의 주체적 자세가 반영된 《역옹패설》을 쓰다

1342년(충혜왕 복위3) 여름. 56세의 이제현은 《역옹패설(翁稗說)》이라는 저작집을 완성하고 다음 해에 발간했다.

이 책은 이인로(李仁老)가 심심파적으로 썼다는 《파한집(破閑集)》, 그것을 보충했다는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과 아울러 고려시대의 3대 비평문학서로 꼽힌다. 이제현은 서문에 이렇게 썼다.

여름에 비가 줄곧 달포를 내려 집에 들어앉았는데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답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벼루를 들고 나가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 친구들 사이에 오간 편지들을 이어붙인 다음 편지 뒷면에 생각나는 대로 적고는 역옹패설이라 하였다.

《역옹패설》은 저자가 스스로 ‘뒤섞여 어수선한 글로 열매 없는 피 같은 잡문’이라 말하였지만, 실은 자신의 경륜을 펼칠 수 없는 답답한 정치현실을 한탄하는 한숨을 토로한 것이다. 이제현은 이 책에 그가 연구한 역사 논문, 개인의 전기와 그에 관련된 시문, 구전설화와 가요 등을 포함시켰다. 이는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올바로 전하고자 하는 애국적 신념이 결집되고 민족자존의 주체적 자세가 반영된 것이었다. 이제현은 이 책에서 몇 가지를 강조하였다.

첫째, 부당한 사대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조정의 중신이 몽골어를 능숙히 구사할 줄 아는 역관 출신이라 해도 공식석상인 합좌소(合坐所)에서는 역관의 통역도 없이 직접 몽골어로 원나라의 사신과 대화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전통성, 즉 민심 기반이 없는 위조(僞朝)에서의 영화로운 생활은 비판받아야 한다. 삼별초 정권은 고려의 백성들을 협박하고 부녀를 강제로 이끌어 진도에서 비상 정부를 구축하였으므로 민심을 거역한 위조이다.

셋째, 무신정권의 전횡을 폭로하고 그 폐단을 고발하는 현실인식 태도를 지녀야 한다. 주먹바람(拳風), 즉 무신의 완력이 조정을 장악하는 공포정치는 고려의 쇠망을 자초한다.

해가 바뀌어 1343년(충혜왕 복위4) 봄이 돌아왔다.

《역옹패설》 출간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결발동문 안축, 박충좌와 이곡을 위시한 문생들, 그리고 동네의 이웃사촌인 정자후(鄭子厚)와 김륜(金倫)이 수철동 이제현의 집을 방문했다. 정자후와 김륜은 이제현과 같은 동리에 살아 ‘철동삼암(鐵洞三菴)’이라 일컬어졌다.

축하연이 끝날 무렵 이곡이 ‘이조년 대감의 병색이 완연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후 이제현은 이곡을 대동하고 이조년의 병문안을 갔다. 사직한 뒤 한거(閑居)하고 있는 이조년은 이제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익재 대감, 어서 오시게.”

“성산군 대감님, 노환에 몸이 많이 불편하시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합니다.”

“나도 익재처럼 환로(宦路)에서 물러나 책읽기로 소일하고 있네. 익재가 보내준 《역옹패설》을 잘 읽어 보았지. 한유·이백 등을 비롯한 유명한 중국 문인들의 시와 정지상(鄭知常)을 비롯한 우리나라 문인들의 시를 거의 망라해서 평을 하셨더군. 우리 시가 중국의 시에 못하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어. 또한 극단적인 배척이나 악평을 삼간 것은 평소 익재의 성정을 나타낸 것 같고.”

“졸저(拙著)에 대한 과찬으로 알겠습니다. 대감님, 그건 그렇고 금상이 패륜을 저지르고 군왕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지만 고려 사직이 이토록 원나라의 폭압에 짓밟혀야만 하는지 통탄스럽습니다.”

“금상이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신하들인 우리들의 잘못이 크네. 나는 죽을 때가 다 되었네. 익재는 연전에 원나라에 상소장을 올려 금상이 풀려나게 한 것처럼 앞으로도 금상이 바른 정사를 펼 수 있도록 잘 보필해주기 바라네.”

“잘 알겠습니다. 성산군 대감님.”

1343년(충혜와 복위4) 봄. 이제현은 《역옹패설》의 발간을 위해 동분서주한 결과인지 심한 고뿔 몸살로 몸져누웠다. 이웃사촌 정자후가 병문안을 다녀가고 위문 편지까지 보내왔다. 이제현은 이에 대한 답례로 <병중에 우곡(愚谷, 정자후의 호)에게 보내다>라는 시를 안부 인사로 보냈다.

독서는 의혹만 들어 한심스럽고, 도를 들어도 지리함이 부끄럽네.
어찌 창생들의 희망이 달렸으랴만, 잘못 임금께서 알아주심을 입다니.
병들매 세월의 신속함을 깨닫겠고, 한가하매 하루가 몹시도 지루하다.
누워서 평생 일을 곰곰 생각하니, 식자의 웃음 살 일 많기만 하다오.

이 시에서 이제현은 자신이 학문이나 수양이 둘 다 부족하지만 군주의 은총을 입어 계면쩍다고 말하고, 잠시 벼슬에 떠나 있지만 원망이 없다는 심중의 일단을 밝혔다.

1343년(충혜왕 복위4) 5월. 이조년은 미구에 닥쳐올 충혜왕의 죽음을 모르는 채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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