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까프·케이스위스·머렐,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화승 홈페이지 캡처.
화승 홈페이지 캡처.

[일요서울|김은경 기자] 국내 1호 신발기업으로 알려진 토종 아웃도어 대표 브랜드 ‘르까프’의 모회사인 화승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여파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법원이 화승에 대해 포괄적 금지명령을 내리면서 판매수수료를 어음으로 지급받은 백화점 매니저들과 대리점주들은 당장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화승과의 거래로 줄도산 위기에 놓인 협력업체의 한숨도 커지고 있다. 이들은 화승이 법정관리를 신청하기 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담당자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법정관리 여파로 매니저·협력업체 생계 위협 토로 
매니저들 “월급으로 받은 어음, 빚더미 됐다” 분통

르까프와 케이스위스, 머렐 등 3개 스포츠·아웃도어 브랜드를 유통하는 화승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이들 브랜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관련 브랜드에 몸담았던 매니저들과 협력업체의 피해 규모도 만만찮다.   

화승은 지난달 31일 서울회생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이 다음날인 지난 1일 회생절차 개시를 결정할 때까지 채권 추심 등을 막는 포괄적 금지명령을 내리면서 화승의 계좌가 묶인 상태다.

채권단이 밝힌 화승의 부채는 총 2300억 원 규모로 이 가운데 납품업체에 밀린 물품대금은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은 한 달 이내에 회생절차 개시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법정관리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화점과 대리점의 관리자인 매니저들에게 돌아갔다. 화승은 이들에게 판매수수료를 어음으로 지급해 왔다. 어음을 할인해 매장 운영 등으로 쓴 매니저들은 어음이 부도처리 되면서 금융기관의 변제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당장 르까프와 머렐, 케이스위스 매장 관리자 250여 명이 총 250억 원을 갚아야 하는 처지다. 1인당 3000만 원부터 많게는 2억 원에 달한다. 임금 없이 일을 한 것도 모자라 채무까지 지게 된 것이다. 어음을 남발한 화승에 대해 기업 경영보다 기업회생 절차를 미리 염두에 둔 것이란 도덕적 비난도 거세다. 

매니저들은 판매대금 대신 매달 20일 6개월짜리 어음을 받았다. 매니저들이 어음을 디에이치(DH)저축은행에서 현금으로 바꾸면 화승은 대금을 은행에 갚아왔다. 그런데 화승의 채권추심이 중단되면서 어음 상환 의무는 매니저들에게 돌아왔다. 

어음은 사실상 부도 처리가 됐고, 금융기관은 어음을 배서한 매니저들에게 이달 중순까지 추심하라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해진 날짜까지 어음 금액을 상환하지 못하면 매니저들은 신용불량자가 된다.

직원 급여 걱정에 한숨

고등학생, 중학생 자녀를 둔 화승 직영점 매니저 A씨는 당장 자녀들의 학비도 마련하기 어려운 데다가 직원들 월급까지 사비로 간신히 지급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19일 A씨는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판매수수료를 어음으로 지급받았던 게 4장 있다. 올해 1월에 판매한 수수료는 회생 채권에 포함돼서 지급이 안 된다고 한다”고 말했다. 

A씨는 “DH저축은행에서 상환을 안 하면 법적 조치에 들어간다고 한다. 당장 이번 달에도 아르바이트생이나 직원들 급여는 나가야 하는데, 사비로 전부 나갔다. 신용정보가 공유돼 타 금융기관에서 대출도 못 받는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A씨를 비롯한 매니저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듯 황당한 심정이다. 이들에 따르면 화승은 법정관리 신청 전과 후 모두 공문 등을 통해 이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A씨는 “회생 채권에 들어가 있는 어음과 판매수수료를 채권단 협의 하에 법원에 우선 대상으로 조기 지급 신청을 한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협의를 하려면 채권단이 구성돼야 한다. 원래는 18일까지 법원에 서류를 넣는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서류를 냈는지 확인도 안 되고, 채권단이 구성됐는지 여부도 모른다. 회사 담당자는 연락도 안 된다. 법원에서 서류는 계속 날라 오고, 우리는 월급도 못 받고 인건비는 계속 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산업은행 책임론 대두

운동화를 납품하고 대금을 받지 못한 협력업체들은 줄도산 위기에 처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화승의 하청업체 사장이라고 밝힌 B씨는 “이번에 약 80억 원가량의 부도를 맞게 됐다. 르까프 대리점 200여 곳, 백화점 및 로드샵 500여 곳, 하청업체가 50여 곳의 직원 및 가족 1만5000여명이 순식간에 당장 오늘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화승과 거래계약을 하게 된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화승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지분을 갖고 경영에 참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라며 “조건이 좋지 않은 수개월에 이르는 어음발행도 산은을 믿고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화승의 지분은 산업은행과 사모투자합자회사가 100%를 보유한 상태다.

그는 산업은행 책임론을 언급하며 “어떻게 산은이 중소기업 및 영세업체들의 줄도산을 뻔히 바라보고만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정말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일요서울은 화승 측에 조기 지급 신청 및 채권단 구성 등에 대해 묻고자 여러 차례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한편 1953년 ‘기차표 고무신’을 생산한 동양고무공업을 모태로 하는 화승은 1970년대 나이키 신발을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생산하며 사세를 키웠다. 나이키와 제휴를 종료한 1986년에는 자체 브랜드 르까프를 성공적으로 론칭해 전성기를 맞았다.

이어 1998년 IMF 외환위기 충격으로 부도가 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2005년 화의에서 졸업했다. 아웃도어 열풍이 거셌던 2000년대 중후반 반짝 상승세를 보였으나 나이키, 아디다스 등 해외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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