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카톨릭 신도인 김대중 대통령, 이탈리아 방문에 특별한 의미 부여
“북한 비핵화 위해 미국·일본이 북한과의 수교 허용하는 미래 올 것”

이탈리아 바티칸 [뉴시스]
이탈리아 바티칸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일종의 주선외교죠?

▲ 그렇다. 이탈리아는 당시 서구 국가가 제재를 가하는 이란에 대해서도 다른 서방 국가와 달리 이란 혁명지도자를 초청하거나, 터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정치지도자의 이탈리아 방문을 허용하고, 리비아에 대해서는 제재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독특한 외교를 행하고 있었다. 나는 임기 중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 내기 위해 이탈리아 정부와 긴밀히 협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희년(大喜年)이라는 2000년을 맞아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방문했다. 대희년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이 바티칸으로 몰려드는 특별한 성지순례의 해다. 1884년에 이탈리아와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래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의 이탈리아 정상 방문은 역사상 초유의 방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는 18년 동안 유럽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면 정부를 군사정변으로 전복하고 정권을 수립했기 때문에, 가톨릭이 박정희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 특히 바티칸 방문을 환영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가톨릭 신도여서 이탈리아 방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람베르토 디니(Lamberto Dini) 외상이 북한과 수교 교섭을 하기 위해 첫 평양 방문을 앞두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디니 외상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이탈리아가 북한과 수교를 맺는 결정을 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면 우리 측 기본 입장을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첫째, 무력을 쓰지 않고 평화통일을 지향할 것이며, 둘째, 흡수통일을 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셋째,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북한과 공존·공영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했다. 그 요청을 들은 디니 외상은 북한을 개방과 개혁을 통해 국제사회로 끌어내는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때 남북정상회담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미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전 준비 조치로 이탈리아가 역할을 하도록 한 거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나서 독일에서 베를린선언을 했지 않았나? 북한과 교류 협력을 하기 위해서 도로도 깔아주고 철도도 연결하는 인프라를 건설하는 내용이 선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북한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화정책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대북 메시지를 북한 측에 전달한 것은 6·15남북공동선언 때의 정상 방문을 앞둔 사전 조치였던 거다. 디니 외상이 평양을 다녀와 보고를 했다. 전 세계의 국가들이 변화과정을 밟고 있고 개혁개방을 하고 있으므로 북한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는 얘기를 했는데, 북한은 자기 방식으로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거다.

이탈리아는 다양한 방법으로 북한의 변화를 촉진하는 노력을 전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탈리아 방문에 이어 바티칸을 방문해 요한 바오로 2세와 정상회담을 했고, 그 자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방북을 요청해 수락을 받았다. 

당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는 동서 냉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실질적으로 바티칸은 방북을 하기 위해서 각종 노력을 했는데, 북한이 기대만큼 호응해주지 않아서 성사는 되지 않았다.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체제 유지를 위해 개혁개방을 막고 있는 것이다.

-바티칸과 북한 사이에 수교가 있었나?

▲ 수교가 없었다. 북한과 수교가 없는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신부도 보내려 하고 원조사업도 하는 등 북한 개방을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대사는 주이탈리아대사에 이어서 2000년 7월에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귀국했다. 당시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는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졌나? 또 이와 관련해서 어떤 역할을 했나?

▲내가 이탈리아를 떠난 게 2000년 9월이었다. 이임에 앞서 전 이탈리아 수상이자 종신 상원의원인 줄리오 안드레오티(Giulio Andreotti) 의원에게 이임 인사를 갔다. 수상직을 7번 역임한 그와 나눈 대화를 말하고 싶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을 환영하고, 방문이 한반도 평화 안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고 전제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한 가지 조언을 하겠다고 했다. 이탈리아는 지금 통일된 국가인데 남북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통일된 국가지만 북부는 잘살고 남부는 못사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수상직을 역임하면서 제일 역점을 둔 과제가 이탈리아 남북문제 해결이었다고 했다. 세금을 북부에서 많이 거둬서 남부에서 푸는 방법으로 남북문제 해결을 도모하다가 마피아에게 돈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게 됐다고 했다. 통일된 상태에서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지 못했는데,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경제 격차 문제에 계속 직면할 테니 장기 계획을 세워 천천히 해결해야지 하루아침에 해소하겠다고 서둘러도 잘 안 될 것인 만큼 이탈리아의 경험을 유념해 달라는 충언이었다. 남북문제는 한민족이 짊어지고 갈 장기적인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1년 7월에 발령이 났지만, 9월 하순경에 서울에 왔다. 남북기본합의서가 1992년에 발효되어 여타 공동위원회는 몇 차례 열렸는데 합의된 기구임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에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기구가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였다. 

합의된 사항이기 때문에 위원장직 임명을 형식적으로 계속하고 있어서 내가 귀국 후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 위원장직에 임명을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개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된 후, 사찰 규정 합의를 그마저도 지금은 중단되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중요한 합의서가 휴지조각이 되는 현실에 크게 실망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오면서 개인적으로는 모순된 감정을 느꼈다. 이집트에서는 수교를 맺기 위해서 그렇게 힘든 노력을 통해 이룩했는데 상황이 바뀌어 우리가 북한이 수교를 하는 것을 권장하는 입장으로 전환된 현실에 직면한 거다. 외교가 상황과 정책에 따라 급변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우리나라가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수교를 허용하는 미래를 목도하는 때가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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