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충혜왕의 소환과 죽음

한편, 원나라에 소환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고려 국왕으로써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충혜왕은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해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며, ‘일백 처녀 회춘론(백일 동안 어린 숫처녀와 잠자리를 하면 만수무강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환락의 밤에 빠져드는 등 실정(失政)을 계속 자행했다.

이조년이 타계한 그 해 10월. 송악산을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붉게 물들였던 단풍은 모두 지고 계절은 초겨울로 접어들어 북서풍이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이제현은 박충좌, 안축과 함께 개경 십자가의 동서 방향 도로를 따라 흐르는 앵계(鶯溪) 개천가의 단골 술청에 모였다. ‘시국이 하 수상하니 술이나 한잔 하자’고 안축이 소집한 자리였다.

세 사람이 수인사를 나누고 막 자리를 잡으려고 하다가, 문득 바로 옆자리의 손님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나이가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남루한 의복을 걸친 사람 셋이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여 수군거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고로 나라를 망친 임금을 보면 인물이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 예는 드물어. 하지만 왕이 아무리 똑똑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색(色)을 밝히고 부왕의 후비들을 강간하는 희대의 패륜아가 우리 같은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찌 알겠나.”

“간신들이 조정을 틀어쥐고 있으면서 수해나 가뭄이 들었다든지 어디서 도적떼가 일어났다든지 하는 소식은 애써 감추며, 충신이 나서서 간언하면 참소하여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는 형편이니, 나라 꼬락서니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다가 정작 나라에 변란이 일어날 경우에는 왕을 제대로 보필할 충신이 없으니, 삼천리 금수강산이 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옆자리에 있는 민초들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소리를 들은 세 선비들은 갑자기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민심의 소리를 듣고 나니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앞을 가렸기 때문이다.

먼저 안축이 말문을 열었다.

“옆자리의 백성들의 넋두리를 모두 들었겠지만, 석달 전 7월에는 충혜왕의 학정을 참지 못한 현현도가 왕에게 독약을 먹이려다 실패하여 사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두달 전에는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기철 등이 충혜왕이 탐욕스럽고 음탕하여 임금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다는 탐음무도(貪淫無道)를 원의 중서성에 극력 주장하였다네.”

박충좌도 태산 같은 걱정을 쏟아냈다.

“그뿐이 아닐세. 지난 달 계축일에 충혜왕이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준공했는데, 개경에서 왕이 민가의 어린아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괴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가고 숨는 등 소란이 일 정도로 민심이 흉흉하다네.”

이제현은 두 친구의 우국충정에 찬 시국걱정을 듣고 땅이 꺼질 듯 한탄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국격을 실추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네. 그 결과,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할까. 충혜왕의 운이 다한 것 같네. 그것이 어쩌면 고려를 위해서는 다행일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고려의 백성 된 도리를 다해야 하지 않겠나…….”

1343년(충혜왕 복위4) 11월 갑신일.

원나라 조정은 충혜왕을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충혜왕의 악행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원나라도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경 타적(朶赤)과 낭중 별실가(別失哥)를 위시한 원나라 사신 일행이 입국하여 대궐에서 가까운 순천관(順天館 : 외국사신들이 들르던 숙소)에 한동안 머물렀다. 조정에서는 원나라 사신들을 정성껏 수발했다. 사신들의 품계에 맞춰 은화 천냥을 뇌물로 바쳤다. 그리고 기녀들을 들여 시중을 들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신들의 구종잡배들은 그들의 상전들이 자색(姿色)을 타박하여 내친 기녀들을 품고 뒹굴었다.

충혜왕은 조복을 입고 백관들을 인솔하여 원나라 사신을 영접하고 정동행성에 가서 황제의 조서를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타적 등이 충혜왕을 발로 차면서 포박, 부액(扶腋, 곁부축)하여 말에 태워 원나라로 끌고 갔다. 실로 나라의 체통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해 12월 정미일. 재상들과 국로(國老, 고관으로서 치사한 노인들)들이 비상 조정회의를 열었다. 충혜왕의 죄를 용서하여 줄 것을 원나라 조정에 상소하기로 결의했다. 상소장의 작성자로는 당대의 문장가 이제현을 천거했다. 이제현은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며 고민했다.

“나는 그동안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은 충혜왕을 내심 경원시해왔다. 그리하여 충혜왕의 거듭된 출사 요청을 거절하고 환로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못난 암군(暗君)도 고려의 왕이 아니던가…….”

마침내, 이제현은 다시 상소장 작성을 수락했다. 이제현은 마치 전쟁포로처럼 힘없이 끌려가던 충혜왕의 처연한 뒷모습을 떠올렸다. 이윽고 약소국의 신민으로 비분강개를 느끼며 원통한 의분을 담아서 붓을 잡았다. 그러나 만사휴의(萬事休矣),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제현이 충혜왕의 사면을 요청하는 상소장을 원나라 중서성에 올렸지만, 그것은 고려국의 체통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에 불과했다. 상하 관민 모두 왕위의 교체를 바라는 것이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揭陽縣)으로 유배되고 있었다. 게양현은 충선왕이 귀양 갔던 티베트의 살사결보다 5,000리가 더 먼, 연경에서 2만 리 떨어진 곳이었다. 귀양길에는 따르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원나라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왕정(王禎)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1344년 정월 병자일. 충혜왕은 천신만고를 겪으며 게양현을 향해 전거(傳車, 역마)에 실려 귀양 가던 도중, 미쳐 게양현에 도착하지 못하고 악양현(岳陽縣)에서 30세를 일기로 죽었다. 독살된 것이다.

악양은 호남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도시로 양자강과 동정호(洞庭湖,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가 합류하는 지점으로부터 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만약 충혜왕이 세상의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거워할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한다는 뜻의 ‘선우후락(先憂後樂, 범중엄의 岳陽樓記악양루기에 나옴)’을 실천했더라면 이역만리에서 불귀의 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충혜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고려에 전해지자 백성들 중에는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소민(小民, 가난한 백성)들은 “이제 다시 갱생할 날을 보게 되었다”며 기뻐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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