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2018년 3월 추천 가볼 만한 곳 ③

홍범식 고택 전경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홍범식 고택 전경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자,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결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라는 유서를 남겼다. 이를 본 아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아버지는 독립운동가 일완 홍범식이고, 아들은 소설가 벽초 홍명희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은 홍명희는 고향 괴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해 끝내 변절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나는 홍범식의 아들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3월에 괴산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홍범식과 홍명희가 태어난 홍범식 고가에 가보자.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국권을 빼앗는다. 청천벽력 같은 사실이 알려진 뒤 대사헌 송병선, 시종무관 민영환, 외교관 이한응, 러시아 공사 이범진, 금산군수 홍범식, 재야의 선비 황현 등 여러 대신과 선비들은 죽음으로 항거했다. 이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백성의 독립 의식을 깨우쳐 항일운동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아 내가 사방 100리를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탄식하며 자결했다고 한다. 홍범식은 유서를 여러 장 남겼는데, 일부는 일경에게 빼앗기고 다행히 아들에게 남긴 유서가 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는 어떻게 하든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마라.”

괴산시장 입구에 자리한 만세운동 유적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괴산시장 입구에 자리한 만세운동 유적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홍명희는 아버지의 유서를 액자에 넣어 책상 앞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어쩌면 이 유서는 모든 조선 사람에게 남긴 것인지도 모른다. 뒷날 홍명희는 자식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이다.”

괴산 읍내는 유유히 흐르는 동진천을 중심으로 관공서와 상가, 집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작은 야산에 자리한 괴산보훈공원 옆에 홍범식 고가가 있다. 뒤로 장군봉이 우뚝하고, 앞으로 동진천이 흐른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이 보더라도 아늑한 느낌이 드는 명당이다.

홍범식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로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홍씨 집안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들어 태인군수와 금산군수 등을 지냈다. 태인군수 시절엔 의병 부대를 진압하려고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를 설득해 무고한 백성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했고, 금산군수를 지내면서는 국유화될 위기에 놓인 백성의 개간지를 사유지로 인정해주는 위민 정책을 펼쳤다고 한다.

홍범식 고가로 들어서면 사랑채를 만난다. 홍범식의 큰아들 홍명희는 사랑채 가장 왼쪽 방에서 3·1운동을 준비했다고 전한다. 그의 주도 아래 1919319, 괴산산막이시장 거리에서 3·1운동이 일어나 1500여 명이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홍명희는 투옥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사랑채에서 중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정면 5칸에 측면 6칸의 자형으로, 일자형 광채를 맞물리게 해 전체적으로 자형구조다. 이는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안채에서 나오면 길은 장독으로 이어진다. 제법 큰 장독대와 광채가 양반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홍범식 고가를 살펴본 뒤에는 그 옆에 자리한 괴산보훈공원과 3·1운동이 일어난 괴산산막이시장 일대를 둘러보자. 홍범식 고가 옆으로 난 계단을 조금 오르면 괴산보훈공원으로 들어선다. 대묘산 정상 일대에 건립된 괴산보훈공원은 괴산에 흩어진 6·25참전공적비, 무공수훈자공적비, 베트남참전탑 등을 이전하고 충혼탑과 충렬탑을 새롭게 건립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충렬탑에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여학생 동상이 있다. 괴산의 3·1운동이 떠올라 묵념을 올린다.

과신보훈공원 충열탑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과신보훈공원 충열탑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충혼탑 뒤로 난 오솔길을 따르면 울창한 솔숲이 이어진다. 작은 봉우리에서 괴산 읍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동진천이 어우러진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봉우리에서 내려오면 수진교를 건넌다. 천변 느티나무 아래 만세운동유적비가 쓸쓸하게 섰다. 유적비 앞부터 괴산산막이시장 거리가 이어지는데, 여기서 들불처럼 3·1운동이 일어났다. 충북에서 처음 일어난 3·1운동이고, 이후 충북 전역으로 퍼졌다.

홍범식 고가에서 동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달천을 만나고, 달천 변 제월대 절벽 위에 고산정이 자리한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벽초홍명희문학비가 반긴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라는 홍명희의 말이 새겨졌다.

경성(서울)에서 활동하던 홍명희는 1918년 증조모가 별세하자 괴산으로 돌아온다. 3·1운동 이후 가세가 기울어 가택을 처분하고 제월리로 이주한다. 암담한 제월리 시절, 제월대가 그의 마음을 달래준다. 제월대에는 조선 선조 때 충청관찰사 유근이 지은 고산정이 있다. 고산정에 오르니 달천이 유장하게 흐르고, 풍요로운 들판이 펼쳐진다. 홍명희는 고산정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제월대 아래 바위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고 한다.

잠시 제월리에서 심신을 추스른 홍명희는 다시 경성으로 올라가 동아일보주필 겸 편집국장, 시대일보사장, 정주 오산학교장, 신간회 발족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19281121조선일보임꺽정연재를 시작한다. 이 소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옥중에서도 집필했지만, 1937년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 총동원 체제가 깊어짐에 따라 연재는 19397월 영원히 중단됐다. 임꺽정민중의 삶을 탁월하게 표현한 역사소설’ ‘조선말 어휘의 보고등으로 문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월대 주차장에 자리한 홍명희 문학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제월대 주차장에 자리한 홍명희 문학비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이제 괴산의 명소를 둘러볼 차례다. 제월대에서 달천을 따라 5분쯤 차를 몰고 가면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나온다. 김시민 장군은 임란삼대첩에 드는 진주성대첩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충청도 천안 출신으로, 선산이 괴산에 자리해 이곳에 사당이 세워졌다. 사당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졌고, 사당 뒤에 묘소가 있다.

충민사와 가까운 성불산자연휴양림에서 하룻밤 묵었다. 휴양림은 성불산산림휴양단지에 자리한다. 휴양단지에는 휴양림, 생태공원, 미선향테마파크, 생태숲학습관 등이 조성되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 특히 봄에 미선향테마파크의 미선나무 군락지에 꽃이 만발하면 장관을 이룬다.

다음 날은 괴산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기 좋은 연하협구름다리를 찾았다. 구름다리는 괴산댐 안에 형성된 괴산호를 가로지르며, 길이 134m에 폭 2.1m. 다리 중간에 서면 흔들흔들 스릴이 넘치고, 여기서 보는 괴산호가 절경이다. 구름다리는 괴산의 명품 걷기 길인 산막이옛길과 충청도양반길을 이어준다. 어느 길을 택하든 괴산호의 절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수변을 따라 호젓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괴산 여행을 마무리한다.

[글=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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