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2018년 3월 추천 가볼 만한 곳 ⑥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실내 전시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실내 전시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 종로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독립을 염원하는 기운을 타고 3월 13일, 경북 안동에 이르렀다. 이날 울려 퍼진 만세 소리는 보름간 계속됐으며, 14회에 걸쳐 약 1만여 명이 조국의 광복을 부르짖었다. 100년 전 만세 함성을 따라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을 찾았다.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나선 안동은 시·군 단위로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350)가 가장 많은 지역이지만, 그동안 역사의 뒤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가자. 1894년 갑오 의병부터 1945년 광복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안동과 경북 독립지사의 투쟁을 문헌과 자료, 영상으로 소개한 곳이다. 전시 관람은 해설사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좋다. 의병 항쟁과 대구의 국채보상운동, 만주 지역의 항일 투쟁, 의열단과 광복군 전투 등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며, 깊이 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안동은 유학이 뿌리 깊은 지역이지만, 의병 활동이 실패한 뒤 신학문을 받아들인 혁신 유림이 생겨난다. 혁신 유림은 국권을 빼앗긴 이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 투쟁을 이어가는데, 가족과 친지 등 이들을 따라 망명한 사람이 1911년에만 2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험난한 상황에 물심양면 독립군을 도운 이들이 없었다면 만주의 항일 투쟁은 더욱 어려웠을지 모른다.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다. 도쿄(東京)에서 법정투쟁을 벌인 박열은 문경, 의열단 김시현은 안동이 고향이다. 김시현은 영화 밀정에서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의 모티프가 된 인물이다.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 안옥윤(전지현)도 영양 출신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모델로 한다. 남자현은 1933년 하얼빈(哈爾濱) 감옥에서 풀려나 숨을 거두면서까지 독립은 정신으로 이뤄진다는 말을 남겼다.

전시관에는 일제의 고문 시설인 벽관 체험을 비롯해 독립선언서 등사하기, 비밀 요원이 되어 미션 수행하기 등 체험 프로그램이 많아 아이들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다. 야외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린 추모벽이 있다. 전국의 독립 유공자 15000여 명 가운데 경북 출신이 약 2160명이다. 추모벽에 끝없이 새겨진 이름을 하나씩 읽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바로 곁에 의성 김씨 집성촌 내앞마을이 있다. 안동 지역 애국 계몽운동의 산실인 협동학교가 이곳에서 처음 열렸다. 당시 내앞마을은 신학문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한 독립운동가의 요람이었지만, 지금은 한적한 시골이다.

내앞마을 사람들은 일제 치하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싸웠다. 이 가운데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과 일가를 데리고 만주로 망명한 김대락이 있다. 자기 집을 내주며 협동학교를 후원한 김대락은 나라를 잃은 뒤 만주로 떠났는데, 이때 마을에서 150여 명이 그와 함께 망명했다고 한다. 김대락은 힘겨운 상황에도 만주의 생활과 활동을 기록한 백하일기를 남겼다. 마을에는 과거를 잊어선 안 된다는 듯 일송 김동삼의 생가와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쓰인 백하구려(白下舊廬)’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안동의 독립운동 명소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임청각이다. 활짝 연 임청각 대문에는 국무령 이상룡 생가현판이 걸렸다. 고성 이씨 종택인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자, 3대가 독립 투쟁에 나선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의 집이다. 지난해 이상룡의 손부 허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서훈되며 이 집에서 독립 유공자 10명이 배출됐다. 임청각 안에 있는 군자정에는 퇴계 이황이 쓴 현판과 독립 유공자 증서가 나란히 걸렸다. 임청각 내부에 마련된 작은 전시관에는 이상룡과 그 가족이 걸어온 험난한 여정이 자세히 기록됐다.

임청각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임청각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임청각은 원래 민간 살림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99칸 가옥이지만, 지금은 절반가량이 남았다. 독립운동가가 많은 임청각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이 맥을 끊겠다며 집 앞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를 놓았기 때문이다. 이때 대문과 행랑채 등 수십 칸이 강제 철거됐다. 이 사연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소개하며 널리 알려졌다. 다행히 임청각 복원이 결정돼, 몇 년 뒤에는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임청각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고택 체험도 운영한다. 독립운동가의 집이자 500년 역사가 있는 고택에서 묵어가는 하룻밤은 그야말로 특별하다. 한지를 곱게 바른 전통 한옥의 고풍스럽고 아늑한 기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직 쌀쌀한 초봄, 뜨끈한 아랫목에 손발을 넣으면 추위에 움츠러든 몸도 사르르 녹는다. 이왕이면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사랑채에 묵어보자. 긴 밤 꿈속에서 한평생 독립을 향한 길에 섰던 그의 삶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에는 임청각 뒤쪽 담장을 따라 난 소담길을 걸어보자. 무궁화가 곱게 핀 길을 걷다 보면 이상룡 선생의 강인한 정신과 신념이 가슴 깊이 스며든다.

밤이 길게 느껴진다면 월영교를 추천한다. 안동댐 아랫자락에 놓인 월영교는 밤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늦은 시간에도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 월영교에는 원이 엄마 편지로 알려진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안동시 택지조성 중 발견된 무덤에서 무려 400년이나 된 미라 상태의 시신과 한글 편지가 발견됐는데, 병든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의 슬픔과 사랑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한다. 월영교에는 남편의 쾌유를 바라며 자기 머리카락을 넣어 미투리를 만든 원이 엄마의 마음이 담겼다. 미투리 모양을 본뜬 다리를 건너면 괜스레 마음이 애틋해진다. 월영교 앞에 음식점과 카페가 있어 안동의 음식을 맛보며 쉬었다 가기도 좋다.

다음 날은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보자. 도산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퇴계 이황을 모신 곳이다.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난 퇴계는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힘썼다.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한가로운 풍경 속에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과 퇴계 선생 사후에 제자들이 건립한 도산서원이 앞뒤로 자리한다. 1575(선조 8)도산(陶山)’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도산서원 현판은 명필가 한석봉이 썼다.

도산서원 곳곳에 이황의 교육과 학문에 대한 철학이 묻어난다. 제자들이 기거한 농운정사(隴雲精舍)’는 퇴계가 직접 설계한 건물이다. 농운정사는 평면이 일반적으로 잘 짓지 않는 자형인데, 공부(工夫)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옥진각에는 퇴계의 유품과 저서를 전시하며, 그의 학문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선생과 만나는 공간이다. 독립과 민족정신을 담은 시를 쓴 이육사는 교과서에 실린 청포도〉 〈광야를 비롯해 수십 편을 남겼다.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을 염원한 작품을 이곳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육사는 국외를 오가며 독립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으로, ‘이육사라는 필명에서 그의 투철한 독립 의식과 굽힐 줄 모르는 신념이 엿보인다. 이육사는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 사건(장진홍 의거)에 연루돼 17개월간 옥살이하는데, 이때 수인 번호가 264였다. 이후 일본에 저항하는 의미로 이름을 이육사(李陸史)로 지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첫 옥고를 치른 이래, 1944년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총 17차례 수감 생활을 한 그는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독립을 향한 불꽃같은 열망은 그의 작품에 남아 여전히 활활 타오른다. 전시관 2층 끝에 이육사의 고향 마을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 문학카페 노랑나븨가 있다. 차 한 잔 마시며 이육사 시인을 추모하는 마음을 글로 남겨보자.

[글=한국관광공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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