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우려가 현실이 됐다. 북한은 이번에도 ‘완전한 비핵화’에 전혀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제3의 핵시설’은 숨긴 채 영변 하나만 내주고 전면적인 대북제재 해제를 받겠다는 뻔뻔함을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열린 2차 미북 정상회담이 허무하게 결렬된 이유다. 이번 회담의 성과물이 있다면 북한의 비핵화 주장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유일하다. 더 큰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회담 결렬 직후 “의미 있는 진전”, “아쉽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 순간에도 고농축 우라늄(HEU)이 영변 외에 또 다른 대규모 핵시설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문 정부가 이 같은 사실을 직시하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궤도 수정을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배경이다.

- 회담 성과? “김정은 핵 포기 생각 전혀 없다는 것 확인”
- 北 핵 위협 현재진행형이지만... 靑 “아쉽다”·“제재 완화 의지 확인” 안보 의식 ‘제로’

 

“북한은 우리가 (숨겨진 핵시설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란 것 같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2차 미북 정상회담 합의 결렬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영변 외에도 굉장히 규모가 큰 핵시설이 있다”고 거들었다.

‘완전한 비핵화’는 커녕
핵 시설 숨겨둔 김정은

북한은 일찌감치 곳곳에 우라늄 농축 시설을 숨겨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평안남도 남포 일대에 설치한 강선 핵시설이다. 북한은 강선에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위한 원심분리기를 최소 수천 기 설치해 2003년부터 가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심분리기 2000기를 1년간 가동하면 핵무기 1개를 제조하는 데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 약 20∼25kg을 확보할 수 있다. 원심분리기는 가동 시 외부로 드러나는 변화가 없어 또 다른 핵물질인 플루토늄 확보를 위한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에 비해 은폐가 용이하다. 일부 전문가는 북한에 원심분리기가 1만 기 이상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에서 어떤 수준이든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승리를 위해 러시아와 담합했다는 내통 의혹에다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는 문제로 정치적 곤경에 빠져 북핵 관련 업적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회담 전날인 2월 27일 밤에는 그의 전 변호사이자 최측근이었던 마이클 코언이 하원 청문회에 나와 트럼프의 비리를 까발렸기에 더더욱 합의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하지 않았다는 건 그만큼 김정은 위원장이 성의 있는 비핵화 조치를 내놓지 않고 오로지 대북제재만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노이의 실패가 양측 간 협상을 영구히 무산시키는 쪽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김정은 국무위원장, 북한과 계속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시간이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여지를 남겼다. 북한으로서도 국제사회의 압박을 언제까지나 감내하고 살 수는 없다. 냉각기를 가지면서 조만간 협상이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또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애초부터 ‘완전한 비핵화’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이번 회담에서 드러났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이 정말로 ‘완전한 비핵화’를 결단했다면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우라늄 농축시설과 핵폭탄의 신고 및 검증·폐기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 술 더 떠 김 위원장은 또 다른 핵시설을 숨기고 있었다. 비핵화를 하는 척 시간을 끌면서 제재 완화만 받아내겠다는 게 북한의 속내였던 것이다.

文 평화 프로레스,
궤도 수정 불가피

이런 점에서 여전히 ‘장밋빛 미래’만 그리고 있는 우리 정부의 반응은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우려를 자아낸다. 청와대는 지난달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오늘 정상회담에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한다”면서도 “하지만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진전을 이룬 것도 분명해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연계해 제재 해제 또는 완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힌 점은 북미 간 논의의 단계가 한층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룬 논의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과 북한은 앞으로도 여러 차원에서 활발한 대화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2차 미북 정상회담의 핵심 성과는 완전한 비핵화를 하겠다는 북한이 또 다른 핵시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이를 간과한 채 북한에 대한 제재 완화 또는 해제가 이뤄졌다면 북한은 더 많은 핵무기를 만들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논평에는 온통 제재 해제·완화뿐이었다.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청와대는 남북관계에서 너무 앞서가는 모습을 보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9일 트럼프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의 역할을 떠맡을 각오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이행해야 할 비핵화 조건보다는 대북제재 완화나 경제지원 등 상응 조치를 먼저 부각시킴으로써 협상력을 떨어뜨렸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문가들 사이에선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궤도 수정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든 북핵 폐기를 위한 대북 협상이든 최소한 김 위원장이 지금은 핵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토대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정부는 인내를 갖고 대북 제재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이 자신을 지켜주는지, 그 반대인지 계산을 다시 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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