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기업 창업주의 생애와 철학 그 숨은 이야기 1탄

대한민국 1%로 꼽히는 재벌들의 삶은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 연예인과 재벌들의 일상은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끌리는 법이다. 재벌들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나, ‘로열패밀리’처럼 화려하게 살지도 모른다. 동시에 평범한 우리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일요서울]에서 연속기획으로 재계 오너가의 삶을 재조명해봤다. 다르지만 같은 듯 한 그들의 일상을 살펴보자. <편집자 주>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성공한 기업을 일구어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역정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주 대부분은 고난과 시련을 기업 경영의 당연한 과정이라고 여겼고, 기업 외적 요인에서 겪어야 했던 비난과 수모도 담담히 극복함으로써 한층 더 크게 도약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키워드
‘위기를 기회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역시 시대의 변환이 있을 때마다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피하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했다. 특히 삼성그룹이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위기가 닥쳤을 때에도 이병철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호외요, 호외! 재벌 기업 밀수! 삼성, 사카린 밀수!” 지난 1966년 5월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신문 파는 아이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국비료 보세창고에 들어와 있던 특수약품 OTSA를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내다판 것이 문제가 되어 마치 삼성이 밀수를 한 것처럼 오해받고 있었다. 당시 신문들은 한국 제일의 기업 삼성이 밀수를 했다는 비난 기사로 가득 채워졌다. 일부 여당 의원들도 한국비료사건을 전면 재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내 검찰은 검찰 특별수사반을 꾸려 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검찰은 “삼성 임직원 일부를 구속했고, 이병철 회장에 대해서는 밀수사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병철은 이내 장기영 장관을 찾아가 한국비료 주식 51%를 나라에 바치겠다는 내용의 공식문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곧바로 울산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병철이 나타나자 회사 문을 닫는 줄 알고 잔뜩 풀이 죽어 있던 한국비료 직원과 수천 명의 일꾼들이 일제히 환호를 올리며 기뻐했다.

그 후 이병철은 사채를 끌어다 써가며 공장을 지었다. 어떻게 해서든 공사를 마쳐야 했기 때문. 다행히 공장을 짓는 일은 아무 탈 없이 진행됐고, 시험 가동이 진행됐다. 전 세계 비료공장 건설 역사상 ‘최신 규모·최대 기술·최단 공기’라는 3대 기록을 세우는 순간이었다. 한국비료 공장이 비료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이병철을 잡아넣어야 한다고 설쳐대던 정치인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야당 의원들의 입에서도 더 이상 ‘밀수 재벌’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병철은 공장을 짓기 위해 끌어다 쓴 사채를 갚느라 서울 시내에 있는 땅과 동방생명과 함께 넘겨받은 동양화재 등 몇몇 회사를 팔아야만 했다. 남에게 빚을 지고 그 빚을 갚으려고 잘 커나가고 있는 회사를 팔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한국비료 공장 운영이 정상화 되자 한국비료공장을 나라에 바치겠다는 서류를 경제기획원에 보냈다. 그러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2년 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던 이병철은 다시 경영에 참여해 전자산업으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삼성은 세계적인 기업으로 우뚝 서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이병철에게 위기는 곧 기회였던 것이다. 이병철은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항상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아 뚫고 나갔다. 1987년 1월 1일 신년사에서도 그는 “난관은 정복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발전의 기회이기도 하다”며 ‘위기는 발전의 기회다’를 강조했다.


정주영 창업주의 키워드
‘역발상’

범 현대가의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일생 동안 ‘역발상적 사고능력’을 강조했다. 만약 정주영이 고정관념에만 사로잡혀 있는 인물이었다면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거론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가난한 농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자신의 생활에 안주했다면, 한국사에 ‘현대’라는 이름 역시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자고 일해 쌀가게 주인이 되었고, 정신없이 달려 건설 회사를 세웠으며, 결국 현대그룹의 창시자라는 자리까지 올랐고, 여전히 범현대가에 ‘역발상론’을 치켜세우고 있다.

그의 역발상 사례는 수도 없이 많지만 유엔군 묘지를 보리밭으로 덮은 사건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건설 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부산으로 피난을 간 정주영에게 갑자기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긴급연락이 왔다. “부산의 유엔군 묘지에 세계 각국의 유엔군 사절들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이 묘비만 덩그러니 있어 너무 썰렁하오. 그곳에 잔디를 깔 수 있겠소?” 천하의 정주영이라해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순간 발휘된 역발상. 그는 사령부 측에서 제시한 공사비의 3배를 요구했고, 제안이 수락됨과 동시에 트럭 30대를 끌고 낙동강 근처 보리밭으로 갔다. 그는 보리밭 주인에게 보리를 팔라고 설득했고, 이제 막 새싹을 내민 보리를 몽땅 떠서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곧장 유엔군 묘지로 달려가 보리를 옮겨 심었다. 한겨울 황량하기만 했던 유엔군 묘지는 불과 며칠 만에 푸른 보리밭으로 변했다. 미군은 황량한 무덤에서 초록의 언덕으로 바뀐 유엔군 묘지를 보고 감동했고, 정주영의 역발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 후 현대는 미군의 크고 작은 일을 도맡으면서 성공의 발판을 다질 수 있었다.

최근 TV브라운관을 통해 광고되고 있는 현대그룹 광고도 마찬가지다. 지도하나 들고 가서 선박수주를 따왔다는 카피는 그의 역발상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박태준 초대회장 키워드
‘우향우 정신’

포스코는 기초 소재인 철강을 자급자족하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1968년 설립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에게 포스코의 앞날을 맡겼다. 만년적자 상태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은 박태준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투입해 1973년 첫 용광로를 준공하고 쇳물을 생산했다. 1968년 영일만의 모래벌판에 포항제철소를 지을 당시 박태준은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모래벌판에 전 사원을 집합시켰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배상금(대일 청구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는 그의 심정은 비장했다. 그는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 목숨 걸고 일합시다. 실패하면 우향우해서 모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읍시다.”고 말했다.

1992년 정계에 몸담고 있던 그는 포스코에 “고로(용광로) 없이 쇠를 만드는 신공법을 개발해 보라”고 권유했다. 21세기에는 환경문제로 고로 방식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견이었다. 포스코가 파이넥스 공법을 개발하기까지 쇳물은 고로에서만 뽑아냈다. 14세기 이래 고로 방식은 제철공법의 대명사였다. 포스코는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당시 언론들은 이 공법에 대해 “포스코가 순수 자체 기술로 개발한 파이넥스는 지난 100년간 사용했던 용광로를 대체하는 획기적인 기술”이라고 보도하며 극찬했다.


윤윤수 회장의 키워드
‘글로벌 시장 공략’

“외국브랜드를 사들여야 합니다. 지금도 시장에 나오는 유명브랜드가 많아요. 이탈리아 것이면 어떻고 프랑스 거면 어떻습니까? 돈 주고 우리 것으로 만들면 되죠.”

윤윤수 휠라 회장은 “외국의 브랜드를 사들이는 것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2007년 그가 인수한 휠라는 이탈리아 브랜드다. 그래서 한국인 소유지만 국가대표팀을 지원한다면 이탈리아 대표팀을 후원해야 했다. 그러나 휠라 제품의 80%는 시장 특성에 맞게 현지화한 것들이다. 이를 일찍이 눈치 챈 윤윤수는 휠라 본사를 사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4억 달러에 달하는 인수대금 중 4분의 3은 외환은행에서 빌렸다. 이 돈을 빌리기 위해 그는 중국 남미 유럽 등의 판매법인으로부터 브랜드 사용 로열티의 일부를 선불로 받아내기도 했다. 윤윤수의 경영능력과 진실성을 믿은 판매법인들은 그가 휠라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선로열티를 지급하겠다는 의향서에 서명했다. 이 의향서를 모아서 외환은행을 찾아갔다. 이렇게 해서 인수자금의 대부분을 은행에서 조달하고 선로열티를 받아 그 빚을 갚아나가는 거래계약이 성사됐다. 이런 방식의 기업인수는 한국 금융사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이후 상환시한을 넉 달 앞당겨 전액을 상환했고, 최근에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했다.

[산업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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