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술이 몇 순배 돌자 모두는 취기가 오를 정도로 오르자, 거나해진 박충좌가 정색을 하고 조정의 일을 화두로 끄집어냈다.

“익재, 8살밖에 안 된 금상을 대리하여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고 있네. 덕녕공주에게 나이 어린 임금을 빌려준 꼴일세. 공주는 왕의 어머니이지만 몽골 여자가 아닌가? 고려와 원나라의 이익이 충돌할 때 공주가 과연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겠는가? 종사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네.”

연신 술잔만 비우고 있던 이제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지난 7년간 왕 노릇을 한 충혜왕은 희대의 패륜아로 고려 역사상 가장 못난 군주가 되고 말았네. 그는 국정의 근본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네. 충혜왕의 폐정을 옆에서 지켜본 덕녕공주가 성군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올바른 정사를 펼 수 있도록 우리들이 잘 보좌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조정을 다시 정비하고 일으켜 세우기 위해 ‘국정 개혁안’을 상주(上奏)할 계획이네. 우리가 힘을 합쳐 조정에 새바람을 불어넣어 보세.”

안축이 두 사람의 말에 화답했다.

“국정의 개혁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네. 그렇다고 우리들이 손 놓고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랜 세월 동안 재야에서 우국충정으로 갈고 닦은 익제의 국정 개혁안이 기대가 되네.”

박충좌와 안축은 밤이 이슥해져서야 이제현의 집을 나섰다. 두 부부는 대문까지 그들을 배웅하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조심해서 돌아가게.”

“잘 있게, 다음에 또 들르겠네.”

이제현과 박씨 부인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두 선비의 자비를 바라보면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현은 친구들의 익숙한 뒷모습에서 작고한 벗 최해의 빈자리를 봤다.

‘오늘 이 자리에 최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45년 전에 우리 넷은 박연폭포에서 나라에 충성하고, 고려의 번성을 끊임없이 도모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했었지. 이제 어렵사리 함께 일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는데…….’

이제현은 허허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다시 박씨 부인과 주안상을 마주하고 앉아 대작했다. 그리고 먼저 간 벗 최해를 그리워하며 흠뻑 취하고 싶었다.

이제현은 다시 칩거로 돌아감이 어떨까 하는 심사로 박씨 부인의 마음을 떠보는 이야기를 꺼냈다.

“여보, 진(晉)나라 문공(文公, 춘추오패 중 하나)은 43세 때부터 19년을 표랑(漂浪, 떠돌아 헤맴)했다고 하는데, 나도 오랜 세월을 은둔한 것 같소.”

“대감, 그동안 마음고생이 크셨습니다. 이제는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으니 대감의 경륜을 마음껏 발휘할 때가 되었습니다.”

“인생이란 당신처럼 예쁜 부인과 정을 나누며 안락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벼슬은 뭣에 쓸 것이며 권세는 또 어디에 쓸 것이오?”

“대감은 일국의 정승이십니다. 대감을 따르는 학자와 선비들에게 큰 나침판이시니 더 이상 은거는 무책임한 처세라고 생각됩니다.”

정색을 하고 지아비의 출사를 종용하는 박씨 부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녀의 몸에서 싱그럽고 은은한 향내가 묻어나왔다. 분위기를 돋우려는 양 한 길이 넘는 정원의 갈대는 수런거리고 풀벌레 소리는 봄밤의 정취를 돋우었다. 봄바람 소리에 문풍지가 파르르 울었다. 달빛은 여우 짓는 소리를 내며 창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박씨 부인은 40을 바라보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어스름 달빛에 비친 그녀의 육체는 우아함과 더불어 젊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제현의 입술이 술에 달아오른 박씨 부인의 발그레한 입술을 덮쳤다. 그녀는 아득한 현기를 느끼며 손가락에 힘을 들여 지아비의 목덜미를 세차게 감싸 안으며 환희의 몸부림을 쳤다. 두둥실 구름을 탄 듯, 이슬비에 옷소매 젖 듯, 생시인 듯 꿈인 듯 오래간만에 맛보는 운우지정(雲雨之情)으로 두 사람의 몸은 더워지고 숨은 가빠졌다. 감미로우면서 황홀한 봄날 밤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충목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정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다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박씨 부인은 지아비 이제현에게 금관조복(金冠朝服)을 대령하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복직한 후 처음 등청하는 날이니, 의연히 대처하소서…….”

“걱정하지 마시오.”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초야에서 은거하던 이제현은 참으로 오랜만에 대궐로 향하고 있었다. 십자가를 지나 남대가, 관도(官道, 관청거리)를 거쳐 광화문에 들어설 때까지 눈에 익은 거리의 집들과 상점들이 이제현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때 이제현은 무심코 관도 양쪽 가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들을 보고 눈길을 멈추었다. 다소 설레던 등청 길이 무거운 책임감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 맞을 준비를 위해 가지 끝이 뭉특뭉특 잘려나간 가지에는 새순이 무성하게 돋아나 있었다.

이제현은 잠깐 동안의 회상에 잠겼다.

‘저렇게 빈자리가 새희망으로 가득찰 수 있어야 한다. 나도 여름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가로수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되어야지…….’

이윽고 조정의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제현은 충목왕에게 장문의 상소를 올려 국정개혁의 방향을 제시했다.

지금 개혁하면 반길 사람들은 만호가 넘을 것이요, 싫어할 사람은 권호(權豪) 수십 명에 불과할 뿐이옵니다. 이치가 그런즉 무엇이 두려워 개혁을 주저하시옵니까!

정방은 그동안 인사를 독단하면서 수많은 폐해를 끼쳤으니, 마땅히 정방을 혁파하여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 귀속시키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하여 관리들의 공과(功過)를 평가하여야 하옵니다. 이런 제도를 항규(恒規, 제도)로 정착시킨다면 청탁하거나 아첨하는 무리를 근절하고 요행을 바라는 자들을 물리칠 수 있어 흑책(黑冊, 인사문서를 제멋대로 검게 지우고 고치는 일)의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또한 금은과 비단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생산되지 아니하옵니다. 전에는 공경(公卿)들이 피복으로 무늬 없는 천을 쓰면서도 비단옷 입는 듯하였고 그릇은 놋쇠, 자기, 동만을 사용하였사옵니다. 고려 사직이 4백년 동안 보전되어 온 것은 검소한 덕에 의했다고도 볼 수 있사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권문세가에선 금과 옥으로 도구를 만들고 부잣집 여인네들은 비단옷을 땅에 쓸며 다닐 정도로 사치의 극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민생이 곤궁하게 되고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된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 재상들이 비단옷을 입거나 금과 옥으로 그릇을 만들지 못하게 하며 각자가 검약하기에 힘쓰고 위로는 왕에게 풍간(諷諫)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감화시키면 그야말로 나라의 풍속이 순후(淳厚, 양순하고 인정이 두터움)하게 변할 것이옵니다.

이제현은 부정부패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혈안이 되다시피 한 권문세족과 조정 관리들에게 정면으로 붓끝을 겨누었다. 그것은 온갖 수탈과 가혹한 착취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추상같은 항변이었다.

이제현이 상주한 여덟 가지의 주요 ‘국정 개혁안’의 전문은 《고려사》<이제현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⑴ 왕은 경계하고 삼가며 덕성을 닦고 검약한 생활을 하며, 재상과 정사를 의논하며 조정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⑵ 권신들이 발호한 후 시작된 정방을 폐지하고, 고공사(考功司)를 설치해 조정 관리들의 공로와 과실을 밝히고 능력의 유무를 판단해 진급을 결정해야 한다.

⑶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고 해악만 끼치는 응방(鷹坊)·내승(內乘)·보흥고(寶興庫)·덕녕고(德寧庫) 등을 즉시 폐지해야 한다.

⑷ 지방관에 대한 감독과 상벌을 분명하게 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 배를 채울만한 자는 지방관으로 등용하지 말아야 한다.

⑸ 강압적으로 징수한 포(布)는 즉시 본인에게 반환해야 한다.

⑹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강점한 녹과전(祿科田, 관리들에게 녹봉 대신으로 나누어 주는 전답)을 재정비하고 개혁해야 한다.

⑺ 오래된 공부(貢賦)를 독촉해 징수하는 것은 원한만 살 뿐이므로 일정 기간을 정해 감면해주어야 한다.

⑻ 가혹한 수탈에 시달려 저당 잡히거나 팔려간 백성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궁궐의 재산으로 대가를 지불하여 부모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이제현은 어느새 고려조정에서 개혁의 선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국정개혁방안을 통해 측근정치의 폐단을 없애고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성리학의 실천윤리에 따라 민생을 회복하려고 했다.

정방의 폐지, 인사정책의 정상화, 지방관으로 합당한 사람의 임명, 강제로 징수한 포(布)의 반환, 밀린 세금의 탕감 등이 그가 제시한 국정개혁방안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원로 재상으로서 개혁의 당위성을 역설한 이제현은 마침내 충목왕의 부름을 받았다. 허약한 체질로 병을 자주 앓고 있는 어린 왕의 옆에는 덕녕공주가 오만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현은 충목왕을 알현하고 곡배(曲拜)를 올렸다.

“소신 김해군 이제현이옵니다. 새로이 조종(祖宗)의 위업을 주상께서 이어받게 되셨음을 하례드리옵니다.”

충목왕은 모후인 덕녕공주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김해군, 고맙습니다.”

충목왕은 이제 여덟 살. 지존의 자리가 무엇인지, 지존의 몸이 갖춰야 할 품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연치였다. 그러나 아주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을 대하는 태도에는 군왕으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이제현은 어린 충목왕에게 왕도(王道)에 대해 설명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신하로서 몇 가지 아뢸 말씀이 있사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이제 전하께서는 천자의 밝은 명을 받아 조종(祖宗)의 왕위를 계승하시었습니다. 그런데 전왕께오서 실패한 뒤를 맡으셨으니 ‘몸을 삼가하고 경건히 하지 않을 수 없다(小心翼翼 소심익익)’고 하겠사옵니다. 근신하는 실상은 덕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하고, 덕을 닦는 요체는 향학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옵니다. 이제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와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성리학의 도를 익히셔야 하옵니다.”

이때 옆에서 듣고 있던 덕녕공주가 말했다.

“주상의 춘추 이제 여덟 살입니다. 사가(私家)에서라면 또래 아이들과 철없이 뛰어놀 나이예요. 평생 학문을 해야 하는 것이 군주인데, 어린 주상이 학문에 싫증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대비마마,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주상께서는 옛날 원자가 취학할 춘추이시지만, 사가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 나라의 주상이시기 때문에 더욱 경계하고 배워야 하는 법이옵니다.”

“하긴 그러합니다.”

“주상께서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점잖은 집 자제 가운데에서 주상과 비슷하거나 몇 살 위인 아이들로 학문과 예에 밝은 열 명을 시학(侍學, 공부 동무)으로 삼아 좌우에서 보필하게 하면 어떨는지요.”

“그래요,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기왕이면 놀이도 좋아하는 아이들이면 좋겠습니다. 활쏘기와 말 타기도 할 줄 아는 아이들 말입니다.”

“그러하옵니다. 그래서 사서(四書)의 공부가 능숙해져 육경(六經)을 차례로 공부하게 하시면 자연히 교만, 사치, 음란, 방종, 노랫가락, 사냥질이나 여색 같은 것을 멀리하게 될 것이옵니다.”

이제현의 끝없는 강론에 자존심 강한 덕녕공주도 마침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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