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김정아 기자]
[편집=김정아 기자]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유럽 동남부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 다소 낯설고 이름 내세울 곳 없는 듯하지만, 알프스산맥에서 아드리아해까지 때 묻지 않은 자연을 품고 있는 기대 이상의 여행지다. 이웃 국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에 가려진, 슬로베니아의 숨어있는 매력을 탐하며 누린 휴식. 어느새 찾아든 잔잔한 기쁨이 짙게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Vipava Valley
비파바 밸리: 슬로베니아 와인의 자존심

슬로베니아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하이라이트는 와인이다. 유럽 와인 벨트의 중심에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와 토양, 기후, 셀러 방식 등이 비슷한 편이라고 한다. 52종 이상의 포도를 재배하고, 3만여 개에 이르는 와이너리가 있으나 규모가 크지 않고 생산량이 많지 않은 부티크 와이너리가 전부다. 우리가 슬로베니아에 직접 가지 않는 이상 슬로베니아 와인을 접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들끼리만 공유하는 비밀 같은 와인이라고 할까. 그러나 슬로베니아 와인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퀄리티를 인정받는다. 게다가 와인 생산자들은 스스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와이너리에 직접 가보면 와인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열정이 피부에 와닿는다. 대화의 심도가 깊어지면 단순한 와인 테이스팅에서 몇 시간짜리 와인 파티로 뒤바뀌는 일도 종종 있다.

로컬 사람들은 평소의 와인 취향도 존중하지만, 여행하는 지역에 따라 마시는 와인을 달리한다. 리피차와 스코찬 동굴이 있는 슬로베니아 서쪽의 카르스트 지대에서는 테란이라고 하는 특별한 레드와인을 꼭 마신다. 적토색의 비옥한 토양 테라로사에서 키운 레포스크 품종으로 만든 테란은 포도 본래의 향이 강하고 드라이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약간 쓴맛도 난다. 심혈관계 건강에 좋다고 알려져 인기가 좋다. 피란이 위치한 이스트리아 반도에서는 말바지아 화이트 와인이 유명하다.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곁들이면 환상의 궁합이다.

 

슬로베니아의 와인 생산지역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동쪽의 드라바강 유역, 북쪽의 사바강 하류 지역, 그리고 아드리아 해에 맞닿은 서쪽 지역. 전체 생산량의 75퍼센트가 화이트 와인에 집중되어 있다. 비파바 밸리는 국토 서쪽의 카르스트 고원 지대 나노스 산이 굽어보고 있는 계곡이다. 온화한 기후에 복숭아와 자두 같은 핵과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평화로운 동네. 두 개의 메인 타운 아이저슈치나와 비파바를 중심으로 계곡을 따라 작은 마을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고, 가족 단위로 와인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와이너리가 170개 이상 자리 잡고 있다. 비파바 밸리에서는 어디서 무엇을 마셔도 더할 나위 없이 특별한 와인이다. 로컬 품종인 피넬라와 젤렌으로 빚은 화이트 와인이 대세다. 수는 적지만 레드와인의 퀄리티도 훌륭하다. 특히 비파바 밸리의 멜롯 와인은 중부 유럽에서 최고로 친다. 비결은 따뜻한 지중해 기후와 아드리아 해의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고 건조한 보라 바람이다.

레파 비다부티크 와이너리는 비파 밸리의 전형적인 가족 운영 부티크 와이너리다. 로만, 빌마, 이레나, 마티야, 이자, 비토, 이렇게 아버지와 아들, 딸, 사위 등 삼대에 걸친 6명의 가족 구성원이 3만 2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심어진 밭을 일구고 와인을 빚고 있다. 1년 총 생산량은 약 3만 병. 소비뇽, 말바지아, 피노 그리, 젤렌, 로제, 오렌지 와인 등을 주로 생산하는데 미mi처럼 절대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와인도 있다. 말바지아를 좋아하는 마티야와 쇼비뇽을 즐겨 마시는 이레네 부부의 취향을 섞은 큐베 와인.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칸자키 시즈쿠가 된 것처럼 눈앞에 그들의 사계절이 그려진다. 와인 한 잔에 담긴 누군가의 인생이.

 

tip

부티크 와이너리 레파 비다는 포도밭, 가정집, 와이너리가 한 부지 안에 공존한다. 오후 2시부터 9시까지가 공식 운영시간이나 언제든 편하게 방문해도 좋다. 일요일에만 조금 늦은 4시에 문을 연다.

Maribor
마리보르: 슬로베니아 두 번째 도시

안타깝게도 슬로베니아 여행에서 마리보르를 마음에 두는 이가 별로 없다. 수도 류블랴나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왠지 그 어떤 도시보다 관심을 받지 못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리보르의 매력은 바로 그거다. 외부인이 시선을 두지 않는 도시. 거리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철저하게 슬로베니안 리얼 라이프다. 대단히 권할만한 랜드마크는 없는 데다가 또, 마리보르의 강점은 그게 아니므로 그저 로컬 사람들을 따라 먹고 마시며 여유로운 휴식을 누리는 것이 이 도시를 제대로 즐기는 법이다.

심심한 매력의 마리보르에도 하이라이트는 있다. 440살을 넘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Stara Trta’가 마리보르에서 자라고 있다. 그것도 현재까지 정정하게 와인을 생산 중이다. 5세기 켈트족이 여기 땅에 정착할 때부터 이어져 온 슬로베니아 오랜 와인 문화의 상징인 셈이다. 그렇다면, 마리보르에 와서 이 오래된 포도나무가 낳은 와인을 마셔볼까 싶겠지만 일찌감치 기대는 접어야겠다. 아무나 마실 수 없는 와인이니까. 팔지도 않고, 테이스팅도 할 수 없다. 오로지 마리보르의 시장에 의해서 외교적인 목적으로만 쓰이는데, 특별히 제작된 250밀리리터짜리 병에 담긴 와인은 마리보르를 방문한 교황이나 대통령 등에게 증빙 서류와 함께 선물로 귀하게 전달된다. 한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나무는 드라바 강 앞의 건물 외벽에 넝쿨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슬로베니아 와인 박물관과 테이스팅 룸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다. 마리보르 구시가지 중심가는 대부분 보행자 전용도로로 느긋하게 산책하며 즐기기 완벽하다. 크고 작은 광장마다 인상적인 건축물들이 가득하고, 곳곳에 분위기 좋은 야외 카페와 레스토랑이 그림처럼 숨어있다. 마리보르 대성당과 마리보르 국립 극장, 마리보르 성 등의 주요 건물들은 압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도시에 스며들어 있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포토제닉한 장소를 고르라면 1515년에 지은 시청이 있는 메인 광장이다. 마리보르의 예스럽고 아담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표현하는 곳. 광장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플래그 기둥은 1680년대 말 도시 인구의 3분의 1을 휩쓸었던 죽음의 전염병 흑사병이 드디어 끝났음을 감사히 여기며 독실한 시민들이 세운 것으로 메인 광장의 우아함을 더한다.

 

Olimia
올림미아: 공기 좋고 물 좋은, 치유의 온천 지대

이 나라의 자랑은 물이다. 유럽에서 가장 물이 풍족한 나라 중 하나다. 특히 슬로베니아는 자연 그대로의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로 명성이 높다. 이들에겐 언제 어디서든 수돗물을 마시는 게 당연한 일이다. 커피, 와인, 음식을 시키든 상관없이 시원한 수돗물 한 잔이 항상 함께 나오고, 도시 곳곳에서 식수대를 찾는 일도 어렵지 않다. 로컬 사람들이 슈퍼에서 생수를 사 먹는 일은 흔치 않다. 슬로베니아 어디에서든 유전자 변형GMO 식품을 눈 뜨고 찾아봐도 없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축복받은 자연을 품고 있는 슬로베니아에서는 무엇이든 유기농이고 건강하다.

국토의 동부, 크로아티아 국경과 맞닿아 있는 포체트르테크 지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지대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청정한 자연을 품은 판노니아 평원에 온천수를 실컷 즐길 수 있는 헬스 리조트가 여럿 들어서 있어 슬로베니아에서뿐 아니라 가까운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에서도 온천만을 위해 시골 동네 포체트르테크까지 찾아온다. 테르메 올림미아는 그중에서도 최신식의 시설을 갖춘 초호화 스파 리조트다. 부지 안에 들어서 있는 호텔만 3개다. 스파 콤플렉스 역시 오히델리아, 테르말리아, 아쿠아루나 총 3곳으로 각각 수많은 사우나와 자쿠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영장도 8개나 된다. 마치 하나의 마을처럼 모던한 건축물 단지 안에 퍼져 있다. 온종일 즐겨도 시간이 모자랄 규모가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공간으로 구성된 테르메 올림미아는 구매한 티켓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구별된다. 손목에 찬 전자팔찌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데, 사우나 월드 구역의 경우 명심해야 할 주요 사항이 한 가지 있다. 수영복 착용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여러 개의 핀란드 사우나를 비롯해 다채로운 휴식공간과 자쿠지, 수영장 등을 갖추고 있는 곳이자 남녀가 함께 쓰는 공용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누드만 허용된다. 이동할 때나 앉아서 쉴 때 수건을 두르기도 하지만, 사우나에서 땀을 빼거나 수영장에 들어갈 때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다. 슬로베니아 온천 문화라고 생각하면 곧 적응할 수 있다. 다들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에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실내 수영장에서 벌거벗고 수영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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