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김대중 대통령 남북한 철도-시베리아횡단철도 연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장쩌민 中 공산당 총서기 [뉴시스]
장쩌민 中 공산당 총서기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이어서 장쩌민 중국 주석과도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한·중 정상회담에서는 김대중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이 어떤 의제로 대화를 나눴는가?

▲상하이 APEC 정상회담의 주역은 장쩌민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별도로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과 장쩌민 주석의 관심사는 한반도 문제였다.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서 중요한 합의사항 중 하나가 2차 남북정상회담을 한국에서 개최하는 것이었다. 장소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상호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다양한 채널로 2차 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했는데, 특히 북한이 합의사항을 이행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중국에 요청했다.

마침 장쩌민 주석이 2001년 평양을 방문했다. 그때 한국 정부는 외교채널을 통해 장쩌민 주석에게 평양을 방문하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한하도록 거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장쩌민 주석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는 것이 중국의 정책에도 합당하다는 확고한 생각을 밝혔다. 그의 역할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감사를 표했다. 중국은 미국의 반테러 캠페인에 도움을 많이 줬다. 중국도 신장 지역에서 위구르족들이 테러를 일삼았기 때문에 국제적인 반테러운동에 동참했다. 한·중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반테러 공감, 남북관계 개선 합의, 양자 간 우호 협력, 관계 촉진 등이 다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결국 방한하지 않았다. 이전 인터뷰 때, 2000년 6월에 열린 남북정상회담 성사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이 굉장히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대사가 주이탈리아대사로 재임했을 때 몰타 겸임대사도 했는데, 몰타에 있었던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동생 김평일에 관한 일화를 포함해 몰타에 대해 말해 달라.

▲냉전시대 국제정치의 단면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사안이다. 몰타에는 오랫동안 집권을 한 돔 민토프 수상이 있었다. 그는 몰타가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기 위해 반영 운동을 주도한 사회당의 당수로, 김일성 주석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은 둘째 아들 김평일을 몰타에 유학 보내 영어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식견을 갖추도록 배려했다. 내가 주이탈리아대사로 재직할 때 몰타대사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정권이 민토프의 사회주의 정당에서 보수정당으로 바뀔 때다.

보수정당으로 바뀌었지만 돔 민토프 수상이 오랫동안 통치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유산으로 남아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명한 한국인인 김평일의 존재였다. 몰타의 수도 발레타는 협소한 인구 밀집 지역이다. 유학 시 시내를 말 타고 달리던 김평일이라는 인물이 잘생긴 동양인이라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몰타는 과거 북한의 독무대였지만, 지금은 우리의 영향력이 우세한 지역이다. 김평일 대사는 몰타에서 배운 영어 실력으로 지금까지 외교관 생활을 하고 있다.

1989년 12월 미국 부시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몰타에서 열고 동서냉전 종식 선언을 했다. 세계 언론은 “냉전은 얄타에서 시작해서 몰타에서 끝났다”고 대서특필했다. 국제정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러 정상회담이 몰타에서 열렸고, 역사적으로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먼저 몰타를 점령한 후 아프리카로 진격해 이집트를 점령한 적이 있는 요충지가 몰타다. 현재도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가치를 지닌 몰타는 작지만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다.

-한·중 정상회담에 이어서 김대중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정상회담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는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적 있다. 먼저 나홋카 공단을 건설해 한국 기업이 진출하도록 하는 합의를 했다. 바이칼호수 근처에 위치한 코빅타 가스전이 새롭게 발견돼 러시아와 중국 간에 석유와 가스 공급 문제를 협의하고 있는 사실을 알고, 김대중 대통령이 옐친 대통령에게 한국까지 연장해 공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러·중·한 가스 프로젝트 협상이 시작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남북한 철도를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종단철도를 시베리아횡단철도와 연결하는 구상에 대해 협의를 했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은 상하이 APEC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과 개별 정상회담을 가졌다. 코빅타 가스전 개발 사업, TKR-TSR 연결 사업, 나홋카 공단 사업, 베링해협에서의 어업협력 등이 한·러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실무사항을 꼼꼼히 챙기는 타입인데, 푸틴 대통령 또한 실무적인 부분까지 세세히 챙기는 지도자다. 두 분이 한·러 현안에 대해 상세히 논의 했다. 우리 원양 수산업계가 원양어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수역이 제한되어 있다. 쿼터를 확보해 어업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 러시아 연안뿐이다. 베링해협에서 어획쿼터를 받아내는 것이 양국 간의 중요한 관심사항이었다. 원양업계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므로 주러대사관에는 수산관이 파견돼 있고 명태쿼터를 많이 받아내는 것이 관건 임무였다.

-러시아산 명태는 한국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하다.

▲우리가 먹는 명태는 과거에는 동해에서 많이 잡혔는데, 지금은 기후 변화로 대부분 러시아 베링수역에서 잡히고 있다. 어업 문제는 정상 간에 합의될 만큼 주요 현안이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국내적으로 체첸사태와 남캅카스 지역 테러 문제가 빈발했기 때문에 반테러에 대한 국제 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러 정상은 상하이 APEC 정상회담에서 최초로 정치 문제로 대두된 테러 문제를 심도 있게 협의했다. 테러를 규탄하고 반테러운동을 적극 지지해 협력하고 합의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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