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45]
삼 불 망(三不忘) - [45]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9-03-18 13:51
  • 승인 2019.03.18 13:57
  • 호수 1298
  • 5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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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시경연(侍經筵)에 들어가 충목왕을 가르치다

당시 선비로서의 최고 영예와 자랑은 시경연(侍經筵)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1344년 6월. 이제현은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찬성사 박충좌·김륜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돌아가며 충목왕의 글공부를 시강(侍講)했다.

충목왕은 아침에는 조강, 낮에는 주강, 그리고 저녁에는 석강에 나갔다.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 나이었지만 충목왕은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학문을 숭상했다. 충목왕은 여러 명의 경연관(經筵官) 중에서 유독 이제현을 기꺼워하고 따랐다.

충목왕은 이제현에게 선행(善行)과 선정(善政)에 대해 물었다.

“부원군, 역사를 상고하면 선행과 악행이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중하다고 봅니까?”

“역사에 기록된 악행은 선행 못지않게 중히 보셔야 하옵니다. 악행을 바로 보지 않는다면 선행이 보이지 않는 것이옵니다.”

“선정이란 무엇입니까?”

“순리를 따르는 것이옵니다.”

“순리란 무엇입니까?”

“흐르는 물과 같은 이치입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습니다. 물은 자기 형태를 고집하지 않고 계속 낮은 곳으로만 위치를 옮겨갑니다. 강하게 부딪히면 돌아서 가고,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지류들이 합쳐져 대하(大河)를 이뤄냅니다. 정치도 이렇게 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는 것이옵니다.”

충목왕은 이제현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이제현은 한순간의 흐트러짐도 없이 종횡무진 역사와 강론을 펼쳐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여덟 살의 충목왕에게 이렇게 왕도(王道)를 가르쳤다.

“전하, 임금에게도 잘못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올바르게 말해 주는 신하가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구슬에 묻은 티를 숙련된 세공장이가 잘 닦아낸 후에야 보배가 되는 것과 같사옵니다.”

“잘 알겠습니다.”

“전하, 군왕은 눈과 귀가 향락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하며 사치를 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세우고, 그런 과정에서 공적인 과업을 흐리는 사사로운 청탁은 절대 금물이옵니다. 또한 세금이나 노역 같은 일은 심하지 않은지 세세히 따져 보아서 백성들이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하옵니다.”

왕도에 대한 강론이 끝나자, 이제현은 고려의 창업과정과 태조 왕건(王建)의 업적에 대해 충목왕에게 가르쳤다.

“전하, 신은 일찍이 충선왕을 섬겼는데, 왕께서는 ‘우리 태조 왕건의 규모와 덕량은 중국에 나셨더라면 마땅히 송(宋) 태조 조광윤(趙匡胤) 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사옵니다.”

“부원군, 송 태조는 어떤 분인데 우리 왕건 할아버지와 비교하세요?”

“송 태조는 무인보다 문인이 상위에 서는 문치주의를 확립하였으며, 과거시험이 실질적인 관료선발제도가 되게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개국 황제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전 군주들을 죽인 것에 반해, 송 태조는 모두를 포용하였기 때문에 ‘명군 중의 명군’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사옵니다.”

“태조 왕건 할아버지는 어떻게 후삼국을 통일하셨나요?”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태조의 인덕은 천성에서 나왔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지정(至情)에서 나왔습니다. 후백제 견훤(甄萱)의 부자가 서로 해치매 토벌하여 취하였고,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은 군신이 와서 의탁하매 예로써 그들을 대우하였사옵니다. 거란이 발해를 침략해 멸망시키자 국교를 단절하였고, 발해 유민들이 나라를 잃고 돌아갈 데가 없자 이들을 위무하여 받아들였사옵니다. 태조께서는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었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으며, 중신들을 성심껏 대접하면서도 권세는 빌려주지 않았사옵니다. 제왕의 기업(基業)을 세워 자손에게 이어준 일은 진실로 그 법도가 송 태조와 한가지였던 것이옵니다.”

“태조 왕건 할아버지는 어떻게 북방을 개척하셨나요?”

“태조께서는 왕위에 오른 후에 자주 서도(西都)에 행차하시고, 북방의 변경을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살피며 돌아다님)한 것은 그 곳을 근본의 땅으로 삼으려는 까닭이었습니다. 태조대왕의 이와 같은 원모심려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옛 영토를 내 집의 세전지물(世傳之物, 대대로 전하여 내려오는 물건)로 알아 반드시 회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찌 계림(鷄林)을 취하고 압록강만을 칠뿐이었겠사옵니까.”

강론은 계속되었다. 이제현은 태조 이래 고려의 번영을 구가한 문종(文宗)의 업적에 대해서도 충목왕에게 가르쳤다.

“전하, 11대 문종 대왕께서는 고려 최고의 황금기를 이끈 제왕이었습니다. 37년간 재위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 각 방면에 걸쳐 안정적인 토대를 만들었으며, 안으로는 나라의 살림을 살찌우고 밖으로는 요(遼), 송(宋) 등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고려의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문종 할아버지가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지요?”

“그것은 무엇보다 전왕(前王)들께서 닦아 놓은 통치기반 덕분이었습니다. 태조(太祖)께서 후삼국을 통합하여 나라의 기반을 마련했고, 광종(光宗)께서 왕권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개혁했으며, 성종(成宗)께서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여 대내적인 안정을 가져왔으며, 성종과 현종(顯宗)께서 요나라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대외적인 안정을 구축했기 때문이옵니다.”

이러한 이제현의 시강은 어린 충목왕뿐만 아니라 고려의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 섭정모후 덕녕공주에게로 향한 왕도교육이기도 하였다.

어느 날, 오랜 강론에 다소 지루해진 충목왕은 장난기가 발동한 질문을 했다.

“부원군, 대전의 용상에 앉아 있으면 뒤쪽에 발을 치고 앉은 태후께서 ‘기침하지 마라’, ‘고개와 발을 흔들지 마라’ 하시는데 너무 힘들어요.”

“전하, 제왕의 길은 그렇게 어려운 법입니다. 힘들 때는 태조 대왕이나 문종 대왕의 치세를 생각하시옵소서.”

어린 충목왕은 이제현을 만나면 늘 막혔던 가슴이 확 트이고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 같은 상쾌함을 느꼈다. 이제현의 도도하고 논리 정연한 그러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강론이 어린 왕을 들뜨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충목왕과 이제현은 경연장에서 만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지냈다.

당나라의 사가 오긍(吳兢)이 쓴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정관의 치’와 같은 이상적인 시대를 이룩한 정치의 주요 의미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논어》, 《맹자》, 《춘추좌전》, 《서경》, 《자치통감》과 더불어 후대의 중국 황제들에게는 제왕학의 교과서로서 읽혀져 왔으며, 당태종과 위징(魏徵)의 치국문답이라 할 수 있다.

위징은 당나라가 중국 패권 체제인 중화 체제를 형성하고 강대국이 될 수 있도록 만든 명재상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말은 골고루 들으면 현명해지고 한쪽 말만 믿으면 어리석어진다’는 위징의 조언을 평생 실천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제현은 충목왕에게 《정관정요》를 강론하였다.

“당태종이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묻자, 위징은 ‘치국의 근본은 민심을 얻는 데 있습니다’ 라고 설파하며 공자, 맹자, 순자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공자(孔子)는 ‘군사와 식량과 민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식량과 군사는 바로 해결할 수 있지만 한 번 흩어진 민심은 좀처럼 다시 얻기가 어려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맹자(孟子)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임금이 가장 가볍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백성을 얻어야 하며, 백성을 얻으려면 민심을 얻어야 하며, 민심을 얻으려면 백성이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고 백성이 싫어하는 일을 적극 피해야 한다는 이치입니다. 그리고 순자(荀子)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 고 했습니다. 이는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지만, 민심을 잃으면 천하도 잃게 된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부원군, 당태종은 어떻게 인재를 등용했지요?”

“당태종은 친소나 문벌 등을 불문하고 능력 우선으로 인재를 기용하는 임인유현(任人唯賢)의 등용기조를 지켰습니다. ‘명군은 사람 얻는 것을 서두르고 암군은 권세 얻는 것을 서두른다’는 순자(荀子)의 말이 있습니다. 능력 있는 신하를 얻으면 군주 자신은 편안하면서도 나라가 융성해지고 세력 확산을 위해 정실인사를 하면 군주 자신은 지치면서도 나라는 쇠락해지는 법이옵니다.”

이렇듯 충목왕은 소탈한 성품에 성군 자질이 있는 개혁군주였다. 이제현은 시강 틈틈이 충목왕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리고는 하늘을 원망했다. 왕재가 넘치는 어린 왕이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얼굴은 균형이 잡힌 귀상이었지만, 살색이 희고 귓구멍이 성냥개비 한 개가 들어갈 정도로 작아서 건강 운이 좋지 못해 단명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응석을 부리며 자라야 할 나이인데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어.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것이 필경 화근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현은 충목왕을 시강하면서 늘 이런 상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괴로웠다.

그해 10월. 충목왕은 원의 요청으로 개혁파인 왕후(王煦)를 우정승, 김륜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봄에 이제현이 상주한 여덟 가지의 주요 ‘국정 개혁안’의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왕후는 권부의 넷째 아들이며 이제현의 손아래 처남이다. 처음 이름은 권재였는데,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양아들이 되어 왕씨 성명을 하사받았다.

해가 바뀐 1345년(충목왕1).

충목왕은 이제현의 상서에 화답했다. 보흥고(寶興庫, 충혜왕이 사사로이 설치한 재정기관)·덕녕고(德寧庫)·내승(內乘, 궁중의 말과 수레를 맡아보던 관아)·응방(鷹坊, 매의 사육과 사냥을 맡아보던 관아)을 폐지해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며, 선왕이 지은 신궁을 헐어 숭문관(崇文館)으로 바꾸어 짓게 했으며,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권신들이 빼앗았던 녹과전(祿科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제현의 국정개혁방안에 기초한 충목왕의 선정(善政)은 백성들을 환호작약(歡呼雀躍)하게 했다. 충혜왕의 폐정(弊政)으로 인해 원한에 사무쳤던 백성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구동성으로 충목왕을 칭송했다.

“어린 성군이 나왔네.”

“희대의 패륜아가 아들 하나는 잘 낳았다니까.”

“이젠 썩고 병든 나라가 제대로 바뀔 모양이야.”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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