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김정아 기자]
[편집=김정아 기자]

 

뜻밖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순간, 우리는 ‘인연’을 떠올리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이 아닌, 떠나간 어느 곳에서도. 처음 접한 이름 ‘시마네’ 여행 속에서 수수하고 소소한 감성의 인연들을 만났다. 과거와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극히 일본다운 풍경으로 발걸음을 나긋하고 느긋하게 만들어주던 공간들.

시마네현은 돗토리현과 함께 일본의 산인山陰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지역은 ‘일본의 고향’으로 불린다. 시마네현의 이즈모 지방에서 일본의 건국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그런 오랜 역사를 간직했기에 시마네현에는 신과 인간이 교류했던 흔적을 비롯해 신비한 풍경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인연’을 주제로 매년 열리는 신들의 회의 때에는 전 일본인들의 마음이 이곳으로 향할 만큼 국가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은 소도시의 한적한 전원 풍경이 산과 호수와 바다 사이에서 무르익고, 곳곳에 둥지를 튼 예술적 감각들이 시마네현을 더욱 풍요롭게 가꿔놓고 있다. 국내 저가항공사인 에어서울이 인천에서 시마네현과 가까운 요나고 기타로 공항Yonago Kitaro Airport 사이를 운항하고 있어 이동도 무척 편리하다.

오다 이와미긴잔 과거와 현재의 인연

요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마네현으로 접어들기 직전, 마치 하늘에 닿을 것처럼 경사가 상당히 급한 에시마대교江島大橋를 지난다. 왠지 그 다리를 오르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어 여행은 시작부터 흥미진진해진다. 이와미긴잔石見銀山이 있는 오다시로 가는 차 안에서 발견한 이정표에는 익숙한 한자가 있다. 오다시의 한자명인 대전大田. 이런 걸 두고 인연이라고 할까.

 

차량이 멈춰선 곳, 콧속으로 파고드는 상쾌한 공기에 산기슭 어디쯤이 아닐까 싶다. 한때 세계 최고의 은 생산량을 자랑하던 은광산이 있던 곳이니 그럴 만하다. 살짝 흐린 날씨가 눈앞에 자리한 오래된 마을에 짙은 운치를 더한다. 은광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오모리 마을, 은광산과는 2km쯤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을 보자마자 걷고 싶어진다. 손에 든 카메라 하나만 있으면 광산까지 산책하듯 다녀와도 충분할 것 같다.

과거 광산에서의 작업은 거칠었다. 기계가 아닌 손으로 쪼아서 채굴 작업을 했기에 위험부담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 상황은 마을에 많은 신사가 생겨나게 했다. 골목 사이로 오래되고 키 낮은 건물들이 이어지고, 군데군데 크고 작은 신사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삶의 고단함, 그리고 그 보상으로 이어진 영화로움이 공존하던 당시의 이야기들을 작은 골목을 따라 가며 읽을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고 마을에 과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폐광이 되고 사람들이 떠나간 공허한 자리로 남겨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쓸쓸하지 않다. 언젠가부터 옛것과 이 마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직하게 마을을 되살려 왔다. 이따금 문을 열어 놓은 가게들을 기웃거리다보니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 군겐도群言堂의 간판이 보인다. 이미 한국에도 잘 알려질 만큼 일본의 전국구 브랜드로 명성이 높은 군겐도는 이 마을에서 둥지를 틀고 지금까지 의류와 생활용품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가게 안에 가득히 진열된 제품들은 오래된 공간과 어우러져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욱 환한 빛을 내고 있다. 그 빛을 바라보는 눈은 편안하고 따스해서 참 가져가고 싶은 것들이 많다. 한 지붕 아래에 카페도 같이 있다. 차 한 잔 마시지 않고 앉아 있다 가도 누구도 핀잔을 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더 오래 있고 싶어진다. 그들은 작은 숙소도 운영하고 있다. 옛집을 사들이고 개조해서 만든 방이 몇 개 없는 숙소. 그 속에는 그들이 생각하고 그려가는 세상이 가득하다. 과거의 재생에 대한 그들의 철학, 버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주려는 노력. 그들은 그렇게 가게를 키웠고 마을의 버려진 집들을 하나둘 사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게 해주고 있다. 산간벽지나 다름없는 오모리 마을로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까닭, 군겐도의 작은 숙소인 ‘아베가阿部家’에서 일하는 젊은 남녀의 맑은 눈빛과 꾸밈없는 웃음의 이유가 되고 있다. 군겐도의 주인장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그리고 앞으로 이어나가려고 하는 것은 옷과 생활용품, 그리고 숙소를 만드는 것이 아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모리 마을과 새로운 사람의 인연을 이어주는 일인 것 같다.

오모리 마을을 천천히 세밀하고 정성스레 꾸며가고 있는 다른 이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히다카 빵집을 꾸려 가는 젊은 부부. 독일에서 빵 굽는 기술을 배우고, 그곳에서 어려운 자격까지 취득한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들이 도시생활을 하다가 연고도 없는 이 마을에 들어온 이유는 뭘까. 오모리 마을과 그들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빵집을 둘러보고 그들의 자랑거리인 식감이 딱딱한 독일식 빵을 맛보다가 한편에 나란히 걸린 부부의 자격증에서 한동안 눈이 멈췄다. 나란히, 그렇게 이 작은 마을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그들의 다짐과 약속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들의 마음을 흔든 그 인연의 씨앗은 ‘맛있는 빵이 있어 이 동네에 살고 싶은 이들이 많아지는 그런 빵집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모리 마을에 숨쉬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인 것 같다.

 

 

[info:영화롭던 이와미긴잔]

이와미긴잔은 일본의 전국시대 후기부터 에도시대 전기에 걸쳐 최전성기를 맞이했던 일본 최대의 은광이었다. 한 때,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1을 일본이 담당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이곳에서 생산될 정도였다고 전한다. 약 4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오모리 마을은 에도시대 초기에 만들어져 국가의 관리나 재력가 상인 등이 주로 살던 곳으로 마을의 뛰어난 건축물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1923년에 휴광, 1943년에 이르러 전면 폐광되며 마을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유령 마을로 쇠락했었지만, 지난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며 새로운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쉬어가며 오래 기억해도 좋은 공간들

오모리 마을은 하루쯤 여유롭게 묵어가면 좋은 곳이다. 곳곳에 숨은 문화유산도 챙겨보고,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있는 명소에서 넉넉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지기 때문. 세련된 음식점과 카페, 세상에서 가장 작은 오페라 하우스, 오래된 이발소, 상점 등 둘러볼 것도 쉬어갈 곳도 다양하며, 곳곳에 꼭 한 번쯤 들어보고 기억해도 좋을 스토리들이 많이 남아있다.

군겐도 : 오모리 마을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 넣은 마츠바토미 씨의 생활용품숍으로 일본 곳곳에 약 30개의 직영점을 둔 브랜드. 의류, 침구, 생활용품 등을 판매하며, 내부 카페에는 차와 커피, 식사 등이 준비되어 있다. 인근의 아베가는 군겐도의 주인이 운영하는 숙소로, 폐가를 오랜 시간 고쳐 만든 옛집으로 지금은 예약마저 쉽지 않은 명소다.

히다카 : 독일에서 제빵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한 명인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독일 빵가게로 식감이 딱딱한 빵들이 많다. 캄파니오빵을 비롯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이용하여 만든 빵들이 구워지고 있으며, 늘 많은 이들이 찾아와 일찌감치 마감하는 날이 많다.

즈이엔트 :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탈리아의 카리아리 커피의 일본 내 총판이었던 곳이었지만, 최근 상호를 ‘ZUIENT'로 변경하고 새로운 커피와 이탈리안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가게 이름은 인연을 맺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뜻이다.

나카무라 브레이스 : 사고 등으로 인해 신체의 일부를 다치거나 잃은 이들을 위한 의족과 의수 등을 제작하는 신체보정기기 제작 회사.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회사로 오모리 마을이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을 지원하여 마을 정착 등을 돕고 있다. 본사가 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래된 빈 집들을 개조하여 갤러리, 공연장 등으로 운영하고, 회사에 찾아오는 몸이 불편한 고객들을 위한 특별한 숙소도 운영 중이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업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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