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국민 간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외교가 진정한 외교”

김대중 전 대통령 [뉴시스]
김대중 전 대통령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APEC 정상회담이지만 상하이에서도 4강 외교가 중요했던 것 같다. APEC 정상회담 전에도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방한으로 한·일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한·러 정상회담 이후 또다시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때 주로 어떤 의제가 논의됐는가?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고이즈미 수상과 다시 상하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는데, 지난번 서울 정상회담 때 제기된 사항을 일일이 메모하면서 진전 사항을 챙겼다. 고이즈미 총리가 서울 정상회담 때 한·일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 열심히 연구해 해답을 가져오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하나씩 점검을 해나갔으나 한·일 간 현안은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 확인됐다. 고이즈미 수상은 전범 추모시설을 별도로 두는 문제를 일본에서 논의하고 검토한 결과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고 하며 계속 검토하겠다고 했다. 문화교류와 문화개방 문제에 대해서는 한·일 간에 협력을 해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중요한 현안인 독도 문제와 역사인식 문제 등 본질적인 의견의 차이가 있는 문제에 대해 계속 협의해나간다는 선에서 정상회담이 마무리됐다. 역사인식 문제에 대해 양국 전문가 간 학술토의 등 연구를 통해 의견 접근을 하기로 진전이 있었던 것은 성과로 평가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상하이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데 이어 2001년 11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ASEAN+3 정상회담도 참석했다. ASEAN+3 정상회담 참석 당시 대사는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서 어떤 의제들을 준비했는가?

▲ASEAN+3 정상회담은 1997년 12월에 ASEAN 창설 30주년을 기념해 한·중·일 3개국을 동시에 초청하자는 결의가 계기가 돼 개최됐다. 1997년 이래로 매년 ASEAN+3 정상회담이 열렸다. 2001년에는 브루나이에서 정상회담이 열려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한국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과 김대중 대통령의 비전에 관한 논쟁이 소개되면서 그런 위상을 갖게 됐다.

<포린 어페어스>에 두 사람이 기고를 했는데, 리콴유 수상은 아시아의 유교적인 가치와 서방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는 주장을 편 데 반해,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적인 자유시장경제가 아시아 발전의 원동력이다”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주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보편적인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가치가 아시아를 발전시켰다고 보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특수가 아닌 보편적인 가치를 강조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본다.

아시아 지도자 간 회의에 김대중 대통령이 참석을 하면 이심전심으로 전원이 일어나 박수로 환영과 존경심을 표시했다. 본인의 정치적인 역정이 험난한 데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도자가 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과 주장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김대중 대통령은 아세아를 나누고, IT에서 앞서 있기 때문에 IT가 덜 발전한 나라에게 적극적으로 기술을 전수하고 훈련을 시키겠다는 제안을 했다. 이런 제안이 아세안 회원국 지도자들에게 상당히 어필했다.

브루나이에서 아세안 정상회담을 할 때 브루나이 국왕이 김대중 대통령을 옆자리에 모시기 위해 의전 기준을 따로 정하기도 했다. 브루나이 국왕은 왕비가 둘인데, 자기 옆에 첫 부인을 앉히고 작은 부인 옆에 김대중 대통령을 앉혔다. 좌석 배치 기준으로 수상과 대통령 중에서 대통령을 우선으로 하고, 같은 대통령 중에서 연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의전 규칙을 내세워 김대중 대통령을 제일 상석에 모셨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시아의 최고 지도자라는 위상을 지녔다는 것을 확인하는 외교 현장을 목도하고 자부심을 느꼈다.

-대사는 2002년 2월 주러대사로 부임하게 된다. 주러대사로 부임 후 첫 번째 일정은 무엇이었나?

▲부임 첫날 주말, 러시아를 좀 더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러시아가 배출한, 인정받는 명사가 모두 묻혀 있는 노보데비치수도원 묘지를 찾았다.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는 러시아의 정치·경제·예술·우주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를 빛낸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들에게 마음으로부터의 경의를 표했다. 우리나라처럼 묘비 형태가 일률적이지 않고, 음악인·정치인·문학인·우주인 등 각기 전문 분야의 특생에 맞는 각양각색의 조각물이 설치된 묘소가 인상적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부인 라이사 고르바초프 여사의 처녀 시절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이 세워진 묘소가 주목을 끌었다. 러시아를 빛낸 인물들과 한꺼번에 인사를 나눈 셈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대사를 역대 주러대사 가운데 가장 역동적인 활동을 펼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주러대사로 재임하면서 한·러 관계 발전을 위해 굉장히 많은 활동을 했다. 그중에서도 2002년 7월에 있었던 한·러 친선특급 행사가 특별히 기억에 난다. 우선 한·러 친선특급 행사가 어떤 행사며, 어떻게 진행된 것인가?

▲한·러 친선특급 행사는 전임자인 이재춘 대사가 기획한 것이다. 나는 단지 기획을 집행했는데 나에게는 러시아를 일시에 이해하는 기회를 준 행운이었다. 한·러 친선특급 행사는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었던 어떤 나라도 시도하지 않았던 피플 투 피플 외교, 다시 말해서 풀뿌리 외교의 전형이었다. 외교는 정부 간에 하는 것이지만 국민 간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외교가 진정한 외교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이 러시아와 수교를 하며 대륙 진출의 길이 열렸고, 우리 국력이 세계화로 배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화는 냉전질서가 무너지고 양 진영 간에 소통이 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한국은 동서냉전 때문에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대륙을 향한 열망이 다른 나라보다 컸다고 생각한다. 특급 행사 내용은 한국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300명을 선발해 철도로 시베리아를 함께 횡단하는 경험을 쌓게 하는 목적으로 기획됐다.

원래 서울에서 북한 지역을 통과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유럽까지 가는 철도를 트자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간헐적으로 신문사 주최 등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한 적이 있었으나, 대규모로 시베리아를 관통한 것은 처음이다. 처음에 북한과 교섭을 했는데 여의치 않아 비행기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날아가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대담한 계획을 수립해 실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철도 길이는 9,288km다. 한·러 친선특급 행사의 목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1만 km를 철도로 질주하는 것이다. 각계각층으로 구성된 친선단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노보시비르스크, 그리고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거점도시 7곳을 들러 각기 2~3일씩 머물며 다양한 행사를 전개했다. 정부 인사는 주지사와 면담을, 경제계는 기업 상담회를, 대학생은 그곳 학생들과 축제를 하는 등 직업에 따라 다양한 별도 행사를 펼치며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주관한 대규모 국민 간 교류 형태의 행사는 역사상 처음이었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가 러시아의 일반 국민과 다층·다각적으로 만나는 외교 프로젝트는 그간 억제당했던 욕망이 분출하는 한국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의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러시아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해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까지 포함한 러시아 전역에 대한 지리적 이해를 도모하여 러시아의 국민정서를 파악하고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가 내포된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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