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깃발법’은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에서 1865년에 증기자동차를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영국정부는 증기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게 되면서 마차업자들의 생계를 위협하자 규제 카드를 꺼내들었다. 흔히 ‘적기조례’라고 불리는데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시대착오적인 규제를 질타하고 싶을 때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든다.

처음 실용화된 증기자동차는 시속 30마일까지 달릴 수 있었는데, ‘붉은깃발법’에 따라 시내에서는 3km/h, 시외에서는 6km/h로 속도를 제한했다. 증기자동차는 낮에는 붉은 깃발로, 밤에는 붉은 등으로 선도하는 마차를 졸졸 따라가며 운행했다.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영국은 자동차산업의 주도권을 프랑스, 독일, 미국 등에게 내주고 말았다.

최근 비슷한 사례가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모빌리티업체들이 ‘카풀 서비스’를 내놓고 택시업계가 반발하면서 촉발된 갈등의 해결과정에서 어리석은 결정이 반복되고 있다. 카풀 서비스를 둘러싼 논란은 택시기사의 분신사태 등을 겪으면서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합의안을 도출했지만, 택시업계도 카풀서비스 업체들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정이 되어버렸다.

‘카풀 합의’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공유경제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역행하는 한국판 ‘붉은깃발법’이라고 부를 만하다. 21세기 한국은 19세기 영국에서 마차업자들을 보호하는 결정을 한 것처럼 택시업 종사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도적 합의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도 영국에서처럼 한 산업의 도태로 나타날지는 지켜볼 일이다.

규제는 산업에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규제는 정치에도 작동한다. 21세기 한국정치판에서 는 선거에 대한 규제는 웬만한 산업규제보다 강력하다. 공동체에 기여해 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선거에 나선 후보자는 마음먹는 순간부터 공직선거법의 벽에 부딪힌다. 2004년 개정된 이후 공직선거법은 출마자, 선거운동원, 유권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옥죄고 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현수막 하나도 마음대로 만들어 붙일 수 없다. 현수막의 크기와 개수, 게시할 수 있는 기간과 장소가 법에 정해져 있다. 선거홍보물도 종류와 부수, 내용과 페이지 수까지 선거법에 다 정해져 있다. 지하철 안에서는 명함을 돌려선 안 되고, 우연히 유권자 집에 들러서 인사라도 했다간 곤욕을 치를 수 있는 것이 현재의 선거법이다.

고비용저효율 선거풍토를 바꿔보자는 당시의 개정 취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빛이 바래버렸다. 자유로운 선거운동과 시민 참여를 가로 막는 ‘붉은깃발법’으로 전락했다. 유권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서라도 네거티브 방식에서 포지티브 방식으로 획기적으로 바꿔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장족의 발전을 이룬 한국사회와 정치의 발전 수준을 반영해야 한다.

현재의 선거법 개정 논의는 정파적 이해관계에 머물러 국민들은 이해도 못할 의석수와 배분방식 따위에만 집착하고 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만큼 민주주의의 본령인 시민참여와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확대를 위한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다. 내년 총선 이전에 한국정치에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끼친 선거운동 관련 규제를 걷어내야 한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를 ‘자유롭고 공정하며 빈번하게 치러지는 선거’를 통해 선출된 공직자가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제 국민들에게 자유롭고 공정하며 빈번하게 치러지는 민주주의의 잔치로서의 선거를 돌려줄 때가 됐다.

<이무진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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