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후반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학생처장을 맡으셨던 교수님께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몸부림쳐도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 기득권 세대가 다 은퇴해야 조금은 바뀔 듯하다.” 세월이 흘러 원로가 되신 교수님을 다시 뵙게 되었을 때 “교수님, 이렇게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세상이 별로 바뀐 것 같지가 않은데요?” 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께서는 “그래, 지금와서 보니 기득권에 익숙한 우리 세대가 모두 사라져도 세상이 바뀔까 말까 할 것 같다”라고 자조 섞인 말씀과 함께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자유한국당이 정의당 원내대표의 국회 비교섭단체 대표연설에 항의하며 연설시작 2분 만에 집단적으로 퇴장했다. 얼마 전 자유한국당은 더불어민주당이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 내용에 거칠게 항의하며 제지하자 “야당 원내대표의 입마저 막으려 한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설전을 벌인 바 있다. 양측 모두 다람쥐 챗바퀴 도는 ‘내로남불’ 정치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나 원내대표는 여야 의원들의 고성 속에서 “야당 원내대표 이야기를 들어 달라. 여러분의 이러한 귀 닫는 자세, 여러분들의 이러한 오만과 독선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찬가지로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의 연설 도중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고성을 지르며 항의하기 시작했고, 윤 원내대표는 연설을 잠시 멈추고 “나경원 원내대표께서 답하세요”라고 요구했다. 상대방의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서로 남 탓으로 일관하기는 이래저래 매한가지다.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을 반대하는 자유한국당을 향해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자유한국당이 야당이 된 이후 주로 주장한 것 중 하나가 정부·여당이 야당 말을 듣지 않고 소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한국당도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내로남불의 원조가 바로 자유한국당”이라고 일갈했다. 이에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민주당 안대로 따라가다가 여당의 2중대가 될 수 있다”라고 맞바로 반격한다.

행정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들도 겉과 속이 다른 ‘내로남불’성 발언과 행동으로 인사청문회를 하기도 전에 각종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에 제출한 인사청문회 자료에서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는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인이다.”라면서 장관이 되면 투기 수요를 억제하는 현 정부의 정책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작 본인은 시세차익이 25억원이 넘을 것이라는 보도대로 “꾼”에 가까운 수준의 전형적인 갭투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야당 시절 “조윤선 장관은 연간 5억 원, 문체부 장관이 되기 전에 여성부 장관 시절에는 연간 7억 5천만 원선의 씀씀이로 유명하다.”고 비판의 날을 세웠던 ‘여당 저격수’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최근 5년 동안 부부의 합산 소득과 신고한 재산 증가액이 23억 원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과거의 비판이 ‘내로남불’의 부메랑을 맞아 본인의 과도한 씀씀이를 해명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야말로 기승전 ‘내로남불’ 정치 공화국이 된 지 오래다. 90년대 정치권에서 유래한 뒤 지금까지 너무나도 많이 인구에 회자되고 실제 정치 현실에서도 ‘내로남불’ 현상이 양산되다 보니 이젠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자성어’로 오해할 지경이다.

도대체 언제쯤 “내탓이오”를 외치면서 서로 격려하는 세상이 만들어질까. 뒷세대에게 우리 세대는 과연 어떻게 비추어질까. 그 옛날 학생처장님의 목소리가 오늘도 귓전에 생생해진다. <서원대학교 교수 / 前 대통령직속 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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