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그러나 작용이 크면 반작용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법인가. 개혁이 진행될수록 충혜왕의 측근 인물들과 부원배 등 반개혁 세력이 결집했다. 개혁파와 반개혁파 간의 대결은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개혁파들이 주도했던 주요한 개혁정책은 온갖 부정을 저지르던 부원배들의 반대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편년강목’을 안축, 이곡, 안진, 이인복 등과
함께 증수하다

그해 6월 말. 이제현은 우정승 왕후가 올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경질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반대 세력들의 저항으로 개혁에도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현은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 본질적인 개혁정책을 펴기 위해서는 성군의 자질이 있는 충목왕이 성장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지 않았는가. 충목왕의 왕재를 다듬는 데 성심과 전력을 다하자. 성군의 자질이 있는 충목왕이 성장하면 선정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뜻을 이룰 날이 올 테니 그날까지 때를 기다리자.’

이렇게 결심이 서자 이제현은 박충좌, 안축, 이곡, 안보, 이인복, 최문도 등 성리학자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먼저 이제현이 모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우리들은 작금의 어지러운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여 성리학자의 자부심과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고려 사회를 개혁해 나가야 하네. 그런데 부원배들의 저항이 극심하여 개혁작업이 여의치 않네. 좋은 의견이 있으면 개진해 주시기 바라네.”

찬성사 박충좌가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이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네. 따라서 현실 문제를 개혁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올바른 역사 인식에서 비롯되네.”

찬성사 안축이 이에 화답했다.

“치암(박충좌의 호)이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익재가 중심이 되어 역사 연구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네.”

모두들 두 사람의 뜻에 동조하자, 이제현은 곧 서연을 이들에게 맡기고 충숙왕때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안축, 이곡, 안진, 이인복 등과 함께 증수했다. 이제현은 이 책에 유교의 합리주의사관과 정통과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적 사관이 반영되도록 했다. 또한 충렬·충선·충숙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등 역사서술에 전념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평소의 소신대로 과거제도를 개편하여 사서(四書)가 시험과목으로 채택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성리학자들의 관계 진출이 더욱 촉진되었고, 이들은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점차 세력을 결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제현이 있었다.

이제현은 전통적인 강력한 왕권의 존재가 있어야 난세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정치세력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제현의 정치적 소신은 <삼축잠(三畜箴)>이라는 당시 정치상황의 비유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귀가 있고 눈이 있으며 발톱과 어금니를 갖추고서 뚫린 문 옆에 늘어져 깊은 잠에서 깰줄을 모르는가.(고양이)

꼬리로는 아첨을 부리고 혀로는 핥고 빤다. 싸우지도 말고 장난질도 말아라. 울타리가 무너질까 염려스럽다.(개)

때를 지켜 울며 싸울 때는 암컷도 돌아보지 않지만 똥을 쪼아먹어 살이 쪄서 사람에게 잡아먹히기를 재촉하는구나.(닭)

이제현은 이처럼 현상유지에만 급급한 정치가들을 고양이의 습성에 비유하였고, 원나라에 아첨하여 이권을 추구하는 부원세력들을 개의 습성에 비유하였으며, 싸움에만 몰두하고 있던 권문세족들을 닭의 습성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해 12월 말. 이제현의 예측대로 우정승 왕후가 부원배들의 참소로 파면되었다. 김영후가 우정승으로, 인승단(印承旦)이 좌정승으로, 이곡이 밀직사로 각각 임명되었다.

1346년(충목왕2) 10월 기사일.

이제현은 장인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궁성 동북쪽에 자리 잡은 권부의 집으로 갔다. 권부는 사위 이제현의 손을 꼭 잡고 애원하듯 유언을 했다.

“나는 ‘당대 9봉군’이라는 명예로운 가문을 이끌었지만, 아들 중 하나로 인해 필경 집안이 화를 입을지도 모를 것 같네. 내가 죽고 난 후 집안을 잘 부탁하네…….”

권부는 이제현이 충목왕의 서연에 전념하고 있을 때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의 다섯 왕을 섬기면서 정1품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역임했다. 자신을 포함해서 아들 다섯과 사위 셋이 모두 군(君)에 봉군되어 ‘당대 9봉군 집안’으로 존귀하고 성대함은 비교할 사람이 없었으며, 당대의 부귀와 영화가 견줄 자가 없었다. 아들 준(準), 사위 이제현과 함께 역대 효자 64명의 행적을 기린 <효행록>을 편찬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둘러싼 권력다툼

원나라가 부패와 퇴폐로 찌들어 실정을 거듭하던 충혜왕을 소환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죽이고, 정치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한 고려의 폐정을 개혁하려고 한 주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려가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어 곤궁한 민생이 회복되고 텅 빈 국고가 가득차야만 조공 등 부마국으로서의 소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이 원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346년(충목왕2) 12월 말.

원나라 순제(順帝)는 계림군공 왕후(王煦)에게 ‘폐정을 바로 잡으라’는 제지(帝旨)를 내렸다. 왕후를 폐정개혁의 적임자로 선정한 것이다.

왕후는 평생에 망언을 하지 않았으며, 성품이 굳세고 장중했다. 대의에 통했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다했으며, 충선왕이 토번에 귀양 갈 때 자신이 대신 가고자 하여 원나라 황제를 감동시킨 인물이었다.

왕후는 순제의 제지를 가지고 찬성사 김영돈(金永暾, 김방경의 손자)과 함께 연경을 출발해서 이듬해 2월에 개경에 돌아왔다.

1347년(충목왕3) 2월.

왕후는 수상직에 취임하였다. 그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좌정승 김영돈, 찬성사 안축, 판밀직사사 김광철(金光轍)과 함께 판사(4명)가 되어 정연(鄭)·전녹생(田祿生)·신군평(申君平) 등 34인을 속관(屬官)으로 삼았다.

이로써 이제현의 중단된 개혁 작업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지 문종대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정치도감의 설치 명분은 부원세력과 비리관료를 척결하는 것이었다. 정치도감이 작성한 개혁안의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조사해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도감은 고려말에 설치된 폐정개혁기관 가운데 설치경위, 개혁 내용, 개혁주도 세력의 성격이 가장 주목되는 기관이었다.

정치도감 소속의 정치관(整治官)들이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의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임했는데, 이는 정치관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기삼만의 옥사사건

정치관들은 정리도감장(整理都監狀)을 지침으로 각도에 내려가 토지의 탈점과 겸병을 조사하고, 폐단들을 적발하여 친원세력들을 잡아 구속하였다.

경기 이천의 향리에게서 공전(公田)을 부당하게 뇌물로 받은 우정승 채하중(蔡河中), 정동행성이문 윤계종(尹繼宗), 불법으로 전민탈점을 자행한 기주(奇柱, 기황후의 동생) 등이 그들이었다.

정치관들은 특히 기황후의 집안 동생으로 남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은 기삼만(奇三萬)을 곤장 쳐서 순군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20일 만에 죽어버렸다. 기삼만의 아내가 눈물의 호소문을 정동행성이문소에 올리자 원나라가 개입해서 정치도감 관원인 서호(徐浩)와 전녹생을 국문하고 장형(杖刑)에 처했는데, 이것으로 정치도감의 활동은 좌절되고 만다.

위기를 감지한 좌정승 김영돈이 충목왕에게 상주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도감 관원을 가두셨사옵니까?”

“기삼만은 겨우 남의 전지(田地) 5결을 빼앗은 것뿐인데 어째서 죽이기까지 하였소?”

“기삼만은 집안의 세력을 믿고 악한 짓을 자행하였사옵니다. 어찌 남의 전지 5결을 빼앗은 것뿐이겠사옵니까?”

“…….”

한편, 기삼만의 옥사사건이 일파만파로 증폭되자, 이의 대책수립을 위해 이제현, 왕후, 안축이 한자리에 모였다.

먼저 이제현이 왕후를 다그쳤다.

“처남, 폐정을 바로잡기 위한 정치 개혁은 필연적으로 옥사(獄死)가 뒤따를 수도 있네. 그러나 상대는 기황후의 동생이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자네가 필경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즉.”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제현의 꾸중에 왕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형님, 정치관들이 너무 의욕만을 앞세운 실수였습니다.”

“필시 기씨 일족과 부원배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반격을 할 것이네. 어떤 복안이라도 있는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후가 고심에 찬 대답을 했다.

“형님, 궁즉통(窮則通)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차분하게 대책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안축이 정치관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했다.

“정치관들은 대부분 과거로 등용한 인재들이네.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순을 통찰하는 식견과 권력자에게 굴하지 않는 기개를 갖추고 있네. 대부분이 대간이나 법관으로 일한 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되네.”

이제현이 다시 말했다.

“개혁은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닐세. 개혁의 대상 선정과 속도 조절에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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