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 나치 정권과 그 협력자들에 의하여 6백만 명이 학살되는 탄압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민족이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유일신 사상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대인들의 사상은 그 오랜 세월동안 멸시와 학살과 추방의 반복 속에서 살아남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막부시대 일본은 조선의 대원군 집권 시대만큼이나 쇄국적이었다. 그러나 외국의 선진 문물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고 탐구적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열강들의 힘에 밀려 강제로 문호를 개방한 뒤 이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자 일본인들은 강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일본의 지식인들과 사상가들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21년간 외국을 직접 돌아다니며 밤낮으로 연구한 끝에 사상과 이론으로 확립한 일본제국헌법을 1889년 반포하기에 이른다. 이 바탕 위에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패망했음에도 세계적인 경제국가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외친 마오쩌둥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을 중국화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인민이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투쟁하게 만들기 위해 무려 28년 동안이나 사상과 이론 확립에 공을 들인 덕택이었다.

지금 중국이 미국을 위협하는 국가로 성장한 것도 이 같은 사상으로 무장한 8천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우파 사상은 사실상 백지 상태다. 일제의 영향도 있었으나 서구식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상적 연구가 전무했다.

반면 좌파 사상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해외 한인들과 유학생들에 의해 국내에 그 뿌리를 내렸다.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좌파 세력들은 해방이 되자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 한편, 각종 반민족적 행위를 자행하다 6.25 전쟁 후 진행된 좌익세력 일소 작업 과정에서 거의 괴멸됐고 일부 잔존 세력들은 잠복해 있었다. 국민 정서가 확고한 반공이념으로 무장돼 좌파세력들은 거의 발호가 어려웠다.

그러나 휴전 후 북한의 집요한 대남공작으로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혁명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학원가의 의식화 세력들과 합류해 지하활동으로 좌파운동의 맥을 이어간 것이다.

이들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1970년대였다. 이들은 유신정권을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사회주의 건설목표를 은닉한 채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기치를 내걸며 세력 확산을 꾀했다. 정치문제는 물론이고 노동현장과 농촌, 빈민운동 등에까지 직접 투쟁 영역을 넓혀나갔다.

마침내 이들은 1980년대 ‘서울의 봄’ 등 민주화운동을 겪으며 세력을 양적으로 확대한 뒤 ‘좌파네트워크’를 구축해 제도권과 정부 사이드 등 우리 사회 각계각층을 침투해 영향력을 국가 전반에 확산시켰다.

사회주의혁명 등 반국가 이적활동을 하다가 실정법을 위반하고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인사들이 진보진영 정권시절에 민주화운동가로 둔갑해 거액의 보상금을 받기도 했다. 또한 국가보안법철폐와 양심수전원석방, 공안기관의 무력화 공세를 펼치며 안보 관련 시스템의 약화 및 우리사회의 중추세력인 우파의 무력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남로당과 연관된 ‘제주도 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에 대한 재조명 운동을 대놓고 하고 있고,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6차례나 탈락한 좌익 활동가가 독립유공자 및 건국훈장 수혜자로 둔갑됐으며, 월북한 뒤 북한 최고위직을 지낸 자의 독립유공자 서훈도 노린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미국의 괴뢰'라며 “국립묘지에 안장된 그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라는 섬뜩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이 같은 사상적 뿌리가 있는 좌파에 비해 우파는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주는 국가만 믿고 사상과 이론을 무시해 왔다. 이념 투쟁을 해본 일이 없다.

피투성이 투쟁을 계속해 온 좌파에게 패한 것은 필연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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