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담긴 오쿠니누시노오카미와 이나바의 흰 토끼 조각상

[편집=김정아 기자] [사진=Go-On 제공]
[편집=김정아 기자] [사진=Go-On 제공]

 

뜻밖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는 순간, 우리는 ‘인연’을 떠올리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만이 아닌, 떠나간 어느 곳에서도. 처음 접한 이름 ‘시마네’ 여행 속에서 수수하고 소소한 감성의 인연들을 만났다. 과거와 현대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극히 일본다운 풍경으로 발걸음을 나긋하고 느긋하게 만들어주던 공간들.

 

이즈모 出雲
일본과 세상의 인연

여행의 첫 밤을 지낸 이즈모의 오다 온천은 아담하고 넓다. 많은 이들을 받지 않는 이곳 주인 부부의 욕심은 아담하지만, 짧은 시간 많은 것을 내어주는 그들의 마음은 크고 넓다. 아침의 상큼한 기운이 외딴 은신처처럼 떨어져 있는 작은 오다 온천에까지 찾아드니 모든 인연이라는 뜻의 ‘엔무스비’가 기다려진다. 이즈모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침 일찍 찾은 이즈모 퀼트미술관은 ‘퀼트미술’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생경한 모습이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겨울 휴식에 들어간 고요한 시골마을에 특별한 간판도 없이 서 있는 미술관의 담장은 아직 초록빛을 잃지 않은 정원수가 대신하고 있다. 200년이 넘은 민가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깔끔한 모습의 미술관 속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계절이 펼쳐진다. 1년에 4번, 계절의 이동과 함께 전시장도 모습을 바꾸면서, 천을 누벼 만든 하나의 계절이 전통 일본식 가옥의 구석구석에 흐드러지게 펼쳐져 남의 집 구경이 그토록 신비스러울 수 없다. 신발을 벗고 나무 바닥과 다다미 위를 번갈아 가며 살금살금 걷는다. 걸음을 조심해서라기보다는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술관 속 풍경이 새로운 것을 내어놓으니 오히려 자연스럽다. 퀼트를 이용한 작품들은 공간과 구조에 따라 적절히 배치되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일본의 멋과 정취를 선보인다. 각각의 작품을 꼼꼼히 살피고 알아가다가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집안의 모든 것이 다 작품이다. 퀼트가 아닌 창과 벽, 나무문과 바닥 그리고 꽃 한 송이와 작은 나뭇가지 하나까지도. 창 밖에 펼쳐진 잘 가꾸어진 정원과 멀리 산등성이가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작품 앞에 떨어진 한 줄기의 빛이 퀼트를 통해 만들어진 나뭇잎 하나에 생명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 풍경들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을 즐긴다. 일본식 말차와 화과자를 맛보는 처음 만난 이들의 모습마저도 또 하나의 작품이 된다. 그 모습을 담고 싶어 문득 꺼내든 카메라 속에 잡힌 건, 뜻밖의 인연. 그동안 알지 못한 새로운 일본의 정취다.

시마네반도 가장 서쪽에 위치한 작은 바닷가 마을에 일본에서 가장 높은 석축 등대가 있다. 퀼트미술관의 겨울 평야를 바라보다 새하얀 히노미사키등대 앞에 서니 이즈모가 갖고 있는 자연의 다양함이 부럽기도 하다. 작은 어촌마을을 지나 등대 앞까지 걸어가면 파란 바다를 품은 기암절벽이 펼쳐진다. 절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풍경에 등대를 감싼 하얀 벽돌들이 절묘하게 더해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등대에 올라 전망을 감상하고 돌아가 버리지만,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도보길에는 절벽 위를 걸으며 감상해야 할 풍경들이 적지 않게 기다리고 있다. 느긋느긋 산책을 즐기며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볼 때면 등대는 끊임없이 새로워 보인다. 이곳이 화산섬이 아닐까 싶은 기묘한 바위와 암석들이 길 안에 계속 이어지고, 국가기념물로 지정된 괭이갈매기들의 번식지 후미시마 섬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자태로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주변에 아주 오래된 신사, 히노미사키신사가 있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중, 굉장히 중요한 신들을 모시고 있는 신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사, 가라쿠니 신사도 있다. 정확히 한국신사韓國神社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 그곳에 오래 전 신라와 일본의 인연이 숨어있다고 전해진다. 누구도 확실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의 발걸음이 이곳에 닿았다는 사실이 반가워 시마네와 더욱 가까워진다.

이즈모가 매년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명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주말을 맞은 이즈모타이샤에 국적불문 수많은 여행객들이 찾았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찾은 이들은 아마 ‘인연’이라는 특별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오지 않았을까. 일본에서 신 중의 신이라 불리는, 인연을 점쳐주는 신 ‘오쿠니누시노오카미大國主大神’를 모시고 있으니 말이다. 규모부터 남다른 이즈모타이샤의 입구에서부터 이곳과 얽힌 신화를 만날 수 있다. 오쿠니누시노오카미와 이나바의 흰 토끼 사이의 신화가 담긴 조각상 하나에도 꽤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이지만 껍질이 벗겨진 토끼를 도와준 오쿠니누시노오카미에게 토끼는 어느 공주와의 혼인을 돕고, 이를 질투한 오쿠니누시노오카미의 형들이 막내였던 그를 죽이게 되고, 모후가 다시 그를 살리지만 또 다시 형제들이 그를 죽이고...... 듣고 보면 모든 이야기들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말 그대로의 신화 또는 전설일 뿐이라고 생각되지만 여행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이즈모타이샤에는 매년 음력 10월에 일본 각지에서 8백만 신들이 모여든다. 때문에 이 기간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신들이 출타한 달이라는 뜻의 간나즈키神無月라고 하는데, 이즈모 지역에서는 신들이 모인다는 뜻의 가미아리즈키神在月라고 한다. 신들은 이즈모 지역에 모여 남녀의 인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을 이어주기 위한 회의를 열고, 이 기간 동안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즈모타이샤를 방문해 좋은 인연을 만나기 위해 소원을 빈다. 그런 이유로 이즈모타이샤에 있는 시간은 마치 신화 속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본전, 신들이 묵어간다는 신들의 숙소, 곳곳에 걸린 방문객들의 소원, 그리고 재미삼아 사보는 운수풀이까지. 눈앞의 모든 풍경이 환상 같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담긴 표정은 미래에 대한 진지한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기에 확실한 현실이다. 이렇듯 일본이라는 한 국가의 시작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한 공간에서 만나보는 특별한 인연, 어쩌면 이즈모타이샤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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